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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이응 May 02. 2021

핑크와 잿빛이 함께 만들어 내는 화음

휘슬러의 <Harmony in Pink and Gray>를 보고

미국 화가인 휘슬러 (James Whistler 1834~1903)의 작품 <Harmony in Pink and Gray>를 처음 본 것은 아마 2001년이 아닐까 싶다. 미국 뉴저지에서 잠시 일하게 되었을 때, 짬이 나면 종종 맨하탄으로 미술관 구경을 갔었다. 이 작품은 이스트 70번가에 있는 프릭 미술관 (The Frick Collection) 소장으로 상설 전시되고 있었다. 높이가 2m에 가까운 그림(194cm×93cm)이라서, 작품 속 인물의 크기가 실재 사람보다 크게 느껴졌다. 작품이 있었던 천장 높은 전시실은 프릭 저택의 메인 응접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림은 천장 아래 높은 곳에 휘슬러의 다른 초상화 세 점과 함께 걸려, 관람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압도되었다. 그것이 이 아름다운 여인과의 첫 만남이었다.
 
회색빛 커튼 앞에서 반짝이는 핑크색 새틴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 그림 속 화려한 외모의 주인공은 화가가 고용한 모델이 아니라 사실은 그림을 주문한 런던 거부의 아내인 뮤즈 부인 (Lady Meux)이었다. 흡사 연예인처럼 예쁜 외모의 부인은 또렷한 시선으로 화가와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었다. 함께 걸려 있던 휘슬러의 다른 초상화 속 주인공들이 그들의 은근한 시선을 정면이 아닌 그림 속 옆 쪽을 향한 것과는 다른, 사뭇 대조적인 도도함이 느껴졌다. 그 도발적인 눈빛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내 낯선 이름의 미국 화가가 그린 이 작품에 매료되었고, 집으로 돌아와 작가와 그림 속 주인공인 뮤즈 부인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았다. 구글과 위키피디아 덕분에 흥미진진한 뒷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더 알게 되면서, 나는 이 아름다운 초상화에 대해서 더 큰 애정을 갖게 되었다.
 



뮤즈 부인이 휘슬러에게 네 점의 초상화를 요청한 때는 휘슬러가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화가로서도 큰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휘슬러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881년으로, 3년 전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평론가였던 존 러스킨과의 흥미로운 법률소송에서 승소했지만, 그 비용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파산한 뒤였다. 러스킨이 휘슬러가 불꽃놀이를 묘사한 작품에 대해 “페인트를 캔버스에 뿌려 놓은 것 같은 그림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는 혹평을 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휘슬러는 평론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송사에서 승소했지만, 단돈 1원의 배상금을 받는 상처뿐인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런던을 떠나 베니스에서 14개월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휘슬러는 최고 평론가와의 다툼으로 화단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까닭에, 주류 사교계에서 작품 의뢰가 들어오지 않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사교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뮤즈 부인으로부터 그림을 주문받았다.
 
뮤즈 부인은 당시 런던에서 가장 성공한 맥주회사 가운데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던 헨리 뮤즈의 아내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상류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녀가 뮤즈가(家)의 사람들이나 런던 사교계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출신에 대한 뒷이야기들 때문이었다. 미국 출신의 바텐더, 밴조 연주가 등으로 소개되었지만, 사실은 매춘부였다는 루머가 꼬리표처럼 달려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영국 상류사회는 그녀를 따돌림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인기 있는 가십거리가 되었으며, 그녀의 남편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엄청난 재력을 마음껏 활용하며 세상이 그녀에 대해 부정적인 관심을 갖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런던 도심의 관문이었던 템플바의 대문(Temple Bar Gate)을 사서 자기 저택의 정문으로 사용하고, 공공행사에 과시하듯이 얼룩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녔으며, 이집트 미이라의 시신과 그 케이스를 사들여 자신의 집에 소장했다.
 
이렇게 거칠 것이 없던 뮤즈 부인은 화가에게도 호락호락한 작품 의뢰인이 아니었다. 휘슬러에게 요청했던 네 개의 초상화 가운데 현재는 두 점만 남아있다. <Harmony in Pink and Gray> 이외의 다른 하나는 부인이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Arrangement in Black No.5>로 호놀룰루 미술관 (The Honolulu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세 번째 초상화인 <Harmony in Crimson and Brown; Portrait of Lady Meux in Furs>는 제목처럼 짙은 색상의 모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른, 부인의 화려한 의상이 인상적인 초상화였는데, 모델을 서던 뮤즈 부인과 언쟁을 하던 휘슬러가 그림을 칼로 찢어버려 현재는 사진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네 번째 초상화는 착수도 되지 않았다고 짐작된다.
 
기행을 일삼는 빅토리아 시대의 괴팍한 셀럽이었던 뮤즈 부인이 벌인 최고의 사건은 막대한 그녀의 유산상속과 관련된 일화였다. 53세이던 1910년 남편의 유산을 물려받은 부인은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 재산의 상속자가 누가 될지 역시 세간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녀는 유언장에서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뮤즈가에게 상속하지 않겠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혔다. 그 대신 유산의 상당 부분을 당시 보어전쟁의 영웅이었던 헤드워스 램튼 (Hedworth Lambton)에게 상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이 행운의 상속자에게 요구한 조건은 이름을 뮤즈로 바꾸라는 단 한 가지였고, 램튼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웃에 살았던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게 된 계기는 다소 싱겁게도 경마장에서 아무도 친한 사람이 없었던 뮤즈 부인에게 램튼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고 알려졌다. 막대한 재산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던 뮤즈 부인이었지만, 정작 런던 사교계에서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었던 그녀의 외로운 삶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
 



예술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존재하고 소비된다. 음악으로 예를 들면, 슈만의  피아노 소품 <트로이메라이>를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듣더라도, 그 선율의 유려함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 슈만이 <트로이메라이>가 포함되어 있는 <어린이 조곡>이라는 모음곡을 쓰게 된 이유가 비밀의 연인이었던 클라라가 슈만을 "어린아이 같다"라고 한 것에서 영감을 받은 것을 알게 된다면, 이 아름다운 멜로디가 젊은 작곡가가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라 상상하게 되어 작품 감상의 깊이가 훨씬 풍성해질 것이다. 미술도 마찬가지이다. 장욱진 화백의 <까치>를 본다면 우선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단순한 형상 속에 있는 원과 반원과 타원과 선이 만들어내는 조형미에 마음이 끌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1958년의 단순했던 까치가 후기 작품에 어떻게 정감 있게 변화해 나가는지를 확인해 본다면 작품 감상의 흥미와 재미가 더해질 것이다. 이처럼 예술작품 그 자체만을 감상할 수도 있지만, 그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배경을 알아가는 것도 감상의 방법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다시 뮤즈 부인의 초상화를 본다. 나를 향하고 있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나의 마음이 머문다. 세상의 편견에 마주 서서 기죽지 않는 당당한 시선이다.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어버린 자신의 삶이 부인은 힘겹지 않았을까? 사랑과 꿈을 좇아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그녀의 삶은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세간 사람들이 그녀 남편의 죽음이 그녀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미이라의 저주라고 수군거려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삶에 회색빛 그늘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두운 배경이 있었던 까닭에, 그녀의 화려한 핑크 빛 삶이 대비되어 더욱 눈부시게 보였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그림에서 찾아낸 핑크와 잿빛이 함께 만들어 내는 화음이다.​


(좌) <Harmony in Pink amd Gray> 프릭 미술관 소장 (우) <Arrangement in Black No.5> 호놀룰루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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