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옷이응 May 08. 2021

너를 공전하다

케플러의 행성 운동법칙과 짝사랑의 지구과학


나는 그 주변을 돈다.  아이를 초점으로 큰 타원을 만들며 그 아이를 공전한다. 찌그러진 순회의 궤도는 그 아이 가까이로 나를 데리고 갔다가, 이내 여지없이 그 아이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가까워지는 그 아이를 향해 손이라도 뻗어 잡아보고 싶지만, 결국 나는 닿지 못하고, 하릴없이 이렇게 주변을 돌고 있다.

 

내 감정의 온도는 그 아이와의 거리에 따라 상승과 하락의 싸인파를 그려 나간다. 겨우 잔잔해졌던 마음에 불현듯 티끌 같은 감정의 파문이 일면, 나는 다시 그 아이를 향하고, 설레이고, 사랑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 아이스치듯 지나치, 나는 다시 아쉬워하고, 후회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 이 과정들을 거치며 한 바퀴 감정의 주기를 마무리하면, 내가 살아가는 의 달력’ 1년이 지나간다. 마치 지구가 태양을 향한 바퀴의 궤도를 마치면, 그 사이 스물네 개의 절기를 거쳐 1년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과 같이.

 

 아이와 나 사이의 거리에 따라 내 시간의 속도는 다르게 흐른다.  아이에게서 멀어지는 시간은 감속이 되며 점점 더디게 더디게만 움직인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다가가는 시간은 점점 더 빠르게 빠르게만 다가온다.  아이를 향하는 나의 모든 기다림은 그 아이와 가장 가까워지는 찰나의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 마치 지구가 태양과 가장 가까워지는 근일점 (近日點)을 지나순간과 같. 준비했던 이야기도 미쳐 다 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이유는, 감정의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가 아니라,  아이 가까이에서는 나의 공전속도에 아찔할 만큼 가속이 붙기 때문이다. 현기증이 날 정도의 속도를 겨우 이겨내고 정신을 차려 보면, 나는 덧없이 그 아이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제2법칙 :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다.(면적속도 일정의 법칙)

 

그 아이와 내가 함께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바심에 내 멋대로 마음을 주기 시작한 뒤부터, 한 방향의 내 사랑만 계속 그 아이에게 쌓여갔다. 그 아이가 받은 내 마음의 크기만큼 그 아이는 점점 거대해져 갔고, 나는 반대로 계속 작아져만 갔다. 우리 사이의 무게 추는 크게 기울었다. 나를 잡아 끄는  아이의 매력은 이제 인력(引力) 되어 나를 중심으로 이끌지만, 나는 그 아이를 똑바로 향하지도 못한 채 거리를 두고 주변을 선회하고 있다. 미묘한 거리감이 유지되는 동안만 그 주변에 머물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똑바로 그 아이를 향하는 한 걸음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 이 균형이 깨어졌을 때, 궤도 밖으로 영원히 벗어나 버리거나, 아니면 그 아이에게 가까워져 한 줌 재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아 한없이 가벼워져 버린 내 쪽이다. 나는 이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저 왼쪽으로 비스듬히 그 아이를 바라보며, 앞을 향해 멀어지는 접선을 그어 나간다.


제1법칙 :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타원궤도의 법칙)

 

 공전의 중심은 물론 그 이다. 하지만 원과는 달리 타원에는 두 개의 초점이 있다. 그리고 내 타원 궤도의 또 다른 초점은 나의 자의식이다. 앞뒤 계산 없이 그 아이에게 날아가 버릴 나를 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는 내 자아의 그림자이다. 이 에고가 없었다면, 나는 진작에 그 아이의 대기권 안 쪽으로 넘어 들어가서, 까맣게 타버렸을 것이다. 나를 지켜주는 마지막 안전판, 그런데 두 번째 초점이 조금씩 조금씩 그 아이에게서 달아나는 것을 느낀다. 속절없이 그 아이를 향하는 나의 마음이 안쓰러워서일까? 나의 자의식이 그 아이에게서 멀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공전의 궤도는 더 찌그러지게 되고, 내 공전의 주기는 더 길어질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제3법칙 :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장반경(궤도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조화의 법칙)


 아이의 주변을 하릴없이 돌고 있는 이 공전을 얼마나 더 계속할 수 있을까 싶다가도, 내가 이 공전을 멈출 용기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대신 이렇게 순회의 궤도가 점점 길어져서, 그 아이를 포함한 어떤 누구도 내가  주변을 돌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없게 되길 소망한다. 매우 끈기 있게 관찰하는 눈썰미 좋은 누군가 만이 아주 먼 궤도를 따라 그 아이를 맴돌고 있는 나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 아이에게 연결된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엄지로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