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am Essay Jul 04. 2018

일기, 그리고 편지

일기 

by obstinate


쉬고 싶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들어주고 싶지도 않고, 재미없는 얘기를 떠들고 싶지도 않다. 속에 차오르는 열이 너무 심해서 내 귀랑 눈을 말게 만드는 것 같다. 내 식대로 표현하면 열병이 너무 심해졌다. 어느 단체에 가도, 학교에 가도 오고 가는 얘기들이 재미없다. 그렇다고 내가 애들이랑 말도 못하는 사회부적응자는 아니다. 시답잖은 말에 웃을 줄도 알고, 할 줄도 안다. 근데 진중권이 말했듯이 좌우를 떠나서 헛소리를 들으면 짜증이 난다. 짜증이.


진지하게 혐오하는 인간의 감상과 어쭙잖은 논리가 섞인 헛소리를 듣고 존중해야 한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자기 말은 존중받길 원하면서 혐오하는 말만 쏟아내니.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건 칼로 물 베기 하는 것 같다. 어느 누구 말문을 막아버릴 만큼 유려한 말을, 완전한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말꼬투리에 말꼬투리에… 


짜증 나고 재미없고 덥다.

답답해서 속에 천불만 더 끼얹을 뿐이다. 


그래도 옛날엔 계속 어떻게든 얘기를 나누고 존중하면 서로 얻을 수 있는 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대마저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땐 남들 얘기는 이제 전부 헛소리로 들릴 만큼 귀가 뜨거워졌다. 



편지

초안


지독하게 고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반대로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죠. 하고 싶은 말은 수만 가지였으나 내뱉지 않도록 송곳니의 날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뱉어 내지 못한 말들은 고스란히 눈으로 가 고였습니다. 눈물은 떨어지지 않고 끈적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시선을 위로 넘기며 눈물을 억지로 붙잡았습니다. 놓치는 순간에 무력감을 들키고야 말 테니까요.


눈물을 부여잡는 동안 지금의 감정이 배신감인지 무기력함인지 스스로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점점 송곳니 사이로 쇠맛이 스몄습니다. 비릿함은 절로 눈을 감게 만들었고, 결국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 뒤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 뒷모습이 나약해 보였는지 아니면 단호해 보였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연일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머리 속에서 관념의 풀들을 뿌리째 뽑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뽑고 짓밟을수록 빠르게 돋아나는 풀 따위를 움켜쥐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흙바닥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 풀밭에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눈물을 머금은 풀뿌리는 더 깊게 뿌리내렸습니다. 길쭉한 잎은 날카로워 뺨에 생채기를 내었습니다. 날이 거듭할수록 상처는 늘어갔고, 나는 풀 뽑기를 그만둔 채 울기만 했습니다.


꿈속에선 뺨이 시렸으나 현실에선 가슴팍이 아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으나, 그 말들은 깊은 강물 속에 빠진 유리조각에 불과했습니다. 강물이 빛날 때 이따금씩 반짝거렸으나 손은 닿지 않았습니다. 사실 애써 주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손에 잡고 곱씹어볼수록 상흔이 깊어진다는 것을 여러 날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끼니때마다 체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은 즐거운 일이기도 했으나, 그들이 돌아간 뒤에는 먹은 것을 거의 게워냈습니다. 삼키고 싶었으나 속이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마침내는 문을 걸어 잠그고 뒤뜰에서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 있을 때만큼은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뒤뜰에 누워 있는데 날카로운 풀잎이 종아리를 스쳤습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풀잎을 뜯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뿌리를 파내며 또 울고 울었습니다. 다시 매 끼니마다 체증을 느꼈고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대문도 뒷문도 닫아두고 쓰러진 채로 누워만 있었습니다. 때때로 까치발로 담장 안을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알은체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창 밖을 내다봅니다. 풀밭에 새벽이슬이 빛을 밀어내는 유리조각 같아 보입니다. 이런 날씨엔 아무래도 당신과 나 모두 맨발로 가지치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곁가지를 조심스럽게 다듬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발바닥이 아려서 또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웃자란 가지들을 정리해 봅시다. 그러다 보면, 계절이 바뀌었을 때 탐스러운 열매를 주고받을 수 있겠지요.

작가의 이전글 예민충의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