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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m Essay Jun 29. 2018

예민충의 일기

by 제스  

 

아침 해가 밝았다. 주말 아침에는 네 가족이 모두 모여 아침을 먹는다. 난 저혈압이라 기상하는 게 힘든데, 아빠가 문을 벌컥 열고 함성을 지르듯 억지로 깨운다.


- 가쓰나가 퍼뜩 일어나서 엄마 상 차리는 거 안 돕고 머하노!


나는 그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대충 머리를 묶은 뒤, 자기 전 벗어 놓았던 속옷을 챙겨 입는다. 아빠랑 남동생은 늘 집에서 팬티에 러닝 차림인데, 나는 브래지어에 팬티는 기본이고 헐렁한 티셔츠와 바지를 꼭 챙겨 입어야 한다. 납득할 만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저 2차 성징이 나타나던 때부터 엄마가 가르친 대로 하고 있을 뿐이니까.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거실로 나가면 엄마는 아주 바쁘게 부엌에서 일을 한다. 나를 깨운 아빠는 그새 안방에서 아침 방송을 보고 있다. 남동생은 아직 꿈나라에 있는지 방문이 닫혀 있다. 아빠가 깨우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미 엄마가 차려 놓은 밥상에 수저를 놓고 나니 그제야 아빠가 동생을 깨운다.  동생이 할 일은 별로 없다.  그저 의자에 앉아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으면 된다.


편하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주말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뒷정리는 늘 내 몫이다. 엄마는 출근 준비를 하고, 아빠는 엄마를 데려도 주기 위해 씻는다. 동생은 당연하다는 듯 밥그릇을 싱크대에 넣고 방으로 들어간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정리를 하던 도중에 방에 들어가 있으면 빨리 치우라는 잔소리가 꼭 들려온다. 엄마가 아니면 딸이 해야 하고, 가사 노동은 여성이 해야만 하는 소관처럼. 참다가 볼멘소리를 내뱉으면 꼭 돌아오는 답은 이랬다.


- 연호는 아직 학생이잖아. 공부하느라 피곤한데.


마치 내가 일주일 내내 미술학원을 가면서도 동생 밥을 챙기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던 때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듯. 남동생이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을 것 아니냐고? 누나가 되어서 해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럼 난 언제까지 가사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데? 정연호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군대 제대할 때까지? 취업할 때까지? 


나는 지금 동생보다 더 어린 나이에 가사를 시작했다. 그땐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엄마는 바쁘니까, 내가 해야지. 주변의 자연스러운 무언의 강요도 한몫했다. 


- 역시 집에 딸이 있어야 된다니까.

- 수빈이가 잘하네.

- 딸이 있으니까 편하겠네.


그땐 그 말들이 다 칭찬인 줄 알았다. '착한 딸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불쌍한 대한민국의 중산층 장녀 정수빈은 그 말이 기분 좋았다. 뿌듯했다. 도덕책에서 보던 바른생활 아이가 된 듯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저 말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학대에 지나지 않는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아들이 열한 살, 열두 살 나이에 쓰레기를 내다 놓고 설거지를 한다면 어른들 반응이 어떨까? 그냥 놔둬라, 너네 엄마가 나중에 하게 두고 넌 이리 와서 과일이나 먹어라, 등등의 배려를 했겠지. 성차별이 많이 없어진 것 아니냐고?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한국은 멀었다.


가부장제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 여성이 결혼을 하면 옛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른다든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성은 아빠의 성을 따르게 하는 것. 여자는 결혼을 하면‐마치 여성은 무조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처럼‐출가외인이니 집안의 재산은 모두 남자에게 상속하는 것 등등. 셀 수없이 많은 여남 차별은 전 세계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문제는 시대가 현대에 이르면서 그 악습을 어떻게 철폐하고자 하는 데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은 그 성차별을 없애고자 하는 노력을 전 세계에서 최고로 하지 않는 나라이다. 여성들의 의식은 이만큼이나 높아져 있는데,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것을 방관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방해하려 든다.  인정하지 않는다. 어딜 감히 여자가, 라는 생각이겠지. 기본적으로 여성은 남성의 서열 아래에 있다는 지긋지긋한 편견이 늘 생각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이 많은 생각을 한다. 결론은 언제나 독립이다. 그러나 독립은 또 쉬운가? 한국 대부분의 기업이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여 채용한다는 사실과, 기업 내 성비 차이가 7:3‐물론 남자가 7이다‐이라는 것은 여러 보도자료를 통해 알려진 바 있다. 더구나 남성에겐 군 가산점이라는 제도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A라는 기업에 남성과 여성이 지원했다. 서류전형부터 인적성, 면접전형까지 거쳐 살아남은 두 사람의 점수는 여성 80점, 남성 60점이다. 하지만 여기에 군 가산점이 더해진다면 결국 채용은 남자가 되겠지. 여성이 남성보다 공부를 평균적으로 더 잘하고, 나이가 더 어리고, 스펙이 좋아도 기업은 남성을 더 선호했다. 왜 그럴까? 그리 복잡한 이유는 아니다. 


기업 임원은 거의 남성들이 맡고 있으며 여성 임원은 전무하다. 여성들의 임신으로 인한 조기 퇴사 우려는 그저 핑계일 뿐이다. 3개월 내에 아이를 낳았거나 현재 임신을 한 직장인 여성들에게 물어보라. 당신들의 경력이 임신으로 인해 단절되기를 원하느냐고. 답은 당연히 NO다. 충분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보장된다면 그들은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 참 모순인 게, 여성 구직자의 채용을 꺼리는 이유는 임신과 결혼으로 인해 퇴사하는 것이라 하면서, 남성에게는 도리어 육아휴직을 제공하고 자녀를 위한 각종 지원비와 다양한 복지를 지원해주는 추세다. 여성이 일을 하기 위해선 아이를 낳으면 안 되고, 아이를 낳으면 일해선 안된다. 하지만 남성에게는 그런 제약이 당연히 없다. 오히려 아이를 낳으라고 부추기는 꼴 아닌가?


그러니까, 까놓고 말하자면 남자는 바깥일 해도 되지만 여자가 감히 남자들 일에 끼어들어? 여잔 집에서 애 낳고 밥이나 낳아, 라는 뜻이다. 웃기지 않은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여성이 우여곡절 끝에 회사에 입사하면, 그 뒤엔 여남 임금 차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정말 친한 경우, 혹은 인사과나 총무과가 아닌 이상 회사원들은 서로의 연봉을 알 수 없다. 같이 입사한 동기 같은 경우, 당연히 서로는 서로가 같은 연봉을 받고 있는다 믿겠지. 하지만 나중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면 얘긴 달라진다. 


온갖 부조리함에 대한 화를 꾹꾹 누르고 설거지를 마친 후에, 친구와의 약속을 위해 씻고 화장대에 앉는다. 화장대 위엔 내가 쓰는 스킨, 로션, 크림, 앰플, 토너, 파운데이션, 선크림, 메이크업 베이스 등등이 줄줄이 늘어져있다. 서랍을 열면 입술에 바르는 제품이 스무 가지가 넘고, 아이섀도와 블러셔는 각각 열 가지 정도 있다. 개중에는 몇 번 발라보고 처박아 둔 것이 꽤 된다. 나는 내가 이것들을 사 모을 때만 해도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구입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것 역시 착각. 사회 통념이 강요하는 '여성'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세뇌되었던 것뿐이었다. 


- 여자의 피부는 깨끗하고 밝아야 해.

- 여자는 모공이 넓거나 보여선 안 돼.

- 여자는 항상 화장을 하고 꾸며 단정히 보여야만 해.

- 여자라면 이런 것쯤은 화장대에 있어야 해.


이런 강요가 가장 심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화장품을 파는 회사들이다. 의류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꾸밈 노동을 하고 외모에 돈을 소비하게끔 노출되어 있다. 당장 SNS 타임라인에 뜨는 타겟팅 광고나, 매일 날아드는 광고 메일만 확인하더라도 그렇다. 끊임없이 여성들에게 옷, 가방, 화장품, 액세서리, 다이어트 약, 속옷 등을 구매하도록 유인한다.  그런 상술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들이, '남'에게 보이기 위해 화장품과 옷에 투자하는 비용을 절대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성들이 꾸밈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 돈은 모두 통장에 들어가고 미래를 위한 자금으로 쓰일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꾸밈 노동을 포기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회사, 학교, 아르바이트 등을 간다면 꼭 듣게 될 말들이 있다.


- 너 어디 아픈 거 같아. 입술 색이 하나도 없어.

- 뭐라도 좀 찍어 바르지. 여자가 그게 뭐야.

- 이틀 전이랑 똑같은 옷 입었네?

- 그렇게 어두운 것 말고 좀 밝게 입어봐. 사무실 분위기도 살고 좋잖아.


고작 나는 립스틱 하나 바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아픈 사람'이 된다. 남성들을 돌아보자.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같은 옷을 입어도, 입술 색이 하얗거나 파래도, 피부에 여드름이나 상처 자국이 있어도 남들은 남성들의 꾸밈 상태에 지적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 꾸밈 노동과 외모 가꾸기를 여성에게만 강요한다. 나 역시 그 꾸밈 노동을 할 시간에 좀 더 자고 싶고, 돈도 아끼고 싶다. 그러나 늘 그랬듯, 남의 시선과 사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 물론 지금은 화장품을 의미 없이 사 모으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는 이것이 코르셋 입기며, 꾸밈 노동이자 여성 혐오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현실적으로는 벗어나기가 참 힘들다. 


귀찮은 화장을, 꾸역꾸역 마치고 뒤를 돌면 행거에 차곡히 개 켜져 있는 옷가지들이 보인다. 화장대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두 번 입고 처박아 놓은 것도 많고, 기분을 내기 위해, 예쁘긴 하지만 활동하기 불편한 옷들도 많다. 끈으로 둘러매는 치마,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블라우스, 몸에 딱 맞아떨어지는 얇은 니트 같은.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에는 ‘이런 스타일을 남자들이 좋아한대.’라던가, ‘이런 거 입는 여자를 남자들이 많이 선호한대.’ 같은 광고 문구에 사로잡혀 옷을 샀다. 뭐가 다른 얘기냐고? 결국은 같은 얘기다.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나의 취향과는 상관없는 옷을 사 입는 것. 뷰티 산업의 주 소비층은 여성이며, 남성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카피라이터로 마케팅을 하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결국,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선택되기 위해서,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서 돈을 쓰고, 꾸밈 노동을 하는 것이다. 마치 남성의 눈 밖에 나면 도태되어 버릴 것처럼 위협적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갓 미성년자 딱지를 뗀 스무 살의 여성은 없는 용돈을 쪼개고 쪼개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을 위해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그때 산 옷들의 절반 이상을 버리고, 화장품 사기를 줄여 나가도 후회가 남는다. 조금만 더 일찍 깨달을 걸. 화장품과 옷에 쓸 돈과 시간을 자기계발에 투자할 걸. 그깟 연애가 뭐라고. 그깟 남자가 뭐라고.


페미니즘을 접하고 난 직후에는 내 취향대로 옷을 샀다. 노출이 심하건 말건, 실루엣이 부담스럽건 말건 간에 남자들 시선 의식하지 말고 마음대로 사 입으려 했다. 근데 그것조차도 결국엔 남자들의 눈요깃거리, 혹은 사회적인 성 역할에 나를 가두는 또 하나의 코르셋이라는 걸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이전엔 남자들을 위해 ‘나’를 검열했지만, 이제는 ‘나’를 위해 ‘나’를 검열하는 것이다. 내가 행하는 코르셋 행위가 다른 여성에게도 코르셋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그 결과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아, 고민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기는 있다. 그건 아래에서 설명하겠다.


자주 입는 청바지 위에 얇아서 조금 달라붙는 니트를 입고,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공동현관 밖으로 나가면 뜨거운 해가 내리쬔다. 아파트 입구 부근을 벗어나, 유동인구가 많은 밖으로 향하면 내가 늘 신경 쓰지만, 하루 종일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길거리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형체도 없고, 물증도 없이 오로지 심증만 존재할 뿐이다. 이것을 여성들 사이에서는 ‘시선 강간’이라고 칭한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시선 강간을 아주 당당하게 하는 연령대의 남자들은 보통 40대 이후다. 70대, 80대의 남자들에게는 내 나이대가 손녀 뻘임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전에는 이런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움츠렸고, 괜히 딴 곳을 보고는 했는데 이제는 같이 똑바로 봐 주고 있다. 그렇게 하면 급히 시선을 돌리는 남자들도 있지만 끝까지 위아래로 품평하듯이, 혹은 육고기의 질을 살펴보듯이 시선을 고정시키고 지나가는 남자들이 더 많다. 그저 긴 팔 니트에 청바지를 입었어도 이런 시선이 들러붙는데, 짧은 바지에 민소매라도 입는 날엔 난리가 난다. 남자들의 눈에는 살색 감지기라도 달려있는 걸까? 사실 그저 역겹다는 말 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


시선 강간이 왜 문제인지 설명을 더 붙이자면, 여성을 ‘대상화’하여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끈적하게 들러붙는 시선을 느끼는 순간, 여성은 길거리의 평범하고 흔한 행인이 될 수 없다.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고, 언제든지 범할 수 있는 타깃이 되는 것이다. 시선 강간을 당하는 동안 여성은 움츠러들고, 남성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이런 식으로도 인권은 짓밟힐 수 있다. 그저 긴 머리에 가슴이 있는 ‘여성’이라는 이유 만으로 길거리에서 불편함을 견디고, 눈치를 보고,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저 성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같은 사람인데. 여성을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겠지. 물증으로 남는 것이 없어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도 못하고, 할 수 있는 대응이라고는 그저 똑바로 쳐다봐주는 것뿐이다. 나 역시 시선 강간을 응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왜 길거리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 내가 왜 얼굴도 모르는 남자들 때문에 옷 선택을 하는 데 걱정하고, 검열을 되풀이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했다. 난 거리에 있는 남자들이 무슨 옷을 입든 엉덩이가 작든 가슴이 크든 어깨가 넓든 좁든 관심이 없다. 그를 범하고 싶다거나, 성적으로 욕구를 느낀다거나 하진 않는다. 그러나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최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뻘 되는 남자들의 더러운 시선을 받는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그렇겠지. 이런 데도 여성 혐오가 없다고? 내가 남혐이라고? 


아직 약속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는데도 진이 빠지는 기분이다. 애써 무시하고, 똑같이 쳐다봐주며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에 치마를 차려 입고, 곱게 화장을 한 내 친구가 서 있다. 인사를 하고, 미리 찾아 둔 맛집에 가서 밥을 먹고, 또 조금 걷다가 예쁘다는 카페에 앉아 음료를 주문한다.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러 가면 기본 두 시간은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 대화 주제는 다양하다. 친구의 학교 생활, 나의 다른 인간관계, 친구가 쓰는 틴트, 내가 쓰는 립스틱, 아까 먹은 맛집의 음식, 친구의 연애사 등등. 이 대화에서 페미니즘과 여성 혐오 문제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친구는 기본적으로 참 착하다. 남에게 싫은 소리 쉽게 못하고, 식당에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사항도 몇 번을 망설이는 탓에 내가 대신 따져주고는 했다. 많은 배려를 내게 베풀고, 힘들 때마다 자주 위로를 건네주었다. 하루를 시작할 때는 힘내라는 인사를 해주고, 잠자리에 들기 전엔 오늘도 고생 많았다는 메시지를 남긴 채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그는, 이를테면 ‘각성’을 하지 못한 친구다. 늘 연애를 하고 싶어 했고, 남자 친구를 만났고, 그를 위해 일주일의 스케줄을 조정한다. 정치에 큰 관심도 없고, 편파수사가 왜 편파수사인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녀는, 그녀이지만, 그녀들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또 다른 친구가 권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을 접했다. 그곳에는 100명 중 99명이 페미니스트다. 앞에서 늘어놓은 성역할, 남자 형제와의 차별대우, 가사노동, 꾸밈 노동, 시선 강간에 대해 하루 종일 토로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논한다. 여성차별 문제에 관하여 연대를 외치고, 서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공유한다. 그곳에 있다면 세상이 금방이라도 바뀔 것 같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핸드폰을 끄고 현실을 돌아보면, 그 많던 페미니스트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본인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이 갑갑한 현실에 억지로 순응하려 한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을 하는 여성을 순식간에 예민하다는 듯이 나서서 몰아가기도 한다. 자신은 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는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면서 유난을 떠느냐고. 이해할 수 없다고.


그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노골적인 차별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이 있으니까. 부계중심의 사회에서, 이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태어날 때부터 페미니스트인 사람은 없다. 나 역시, 저랬던 적이 분명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매일의 투쟁과 비판이, 여성들에게 아직 닿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무엇도 소용이 없어져버리는 것처럼 의지가 박살 나 버리고 만다. 나도, 커뮤니티의 페미니스트들도, 전면에 나서서 목소리를 외치고 있는 이들도 ‘자신’ 이 포함된 이 ‘여성 집단’을 위해 저항하고 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고 시작했지만, 결국은 여성 모두가 잘 살기 위해 페미니즘을 하는 것이다. 차라리 중립을 외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느껴질 정도로, 나서서 남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여성들을 보자면 눈 앞이 캄캄해진다.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가해자 역시 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페미니즘은 불온사상도 아니고, 누군가 금전적이거나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려 퍼트리는 사이비 종교는 더더욱 아니다. 이를테면 인종 차별에 대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흑인들이 그들의 피부색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듯, 여성들은 자신의 성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여성들의 성 평등 인권 운동일 뿐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라고 얼굴을 밝히고, 이름을 밝히는 순간, 그 여성은 남자들의 조리돌림의 대상이 된다. ‘네가 못생기고 뚱뚱해서 남자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열등감을 이렇게 푸는구나.’라는 식으로 말이다. 혹은 범해야 할,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강남역 시위나, 최근 혜화역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이 꽁꽁 무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남성들의 조롱거리 대상이 되며, 인터넷에 신상을 퍼트리기 위해 시위 부대에 수없이 많은 카메라를 들이민다. 시위 종료 후 귀가하는 여성들이 옷을 갈아입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의 뒤를 밟고, 그들이 느끼는 공포심을 한순간의 유희거리로 여긴다. 여성이 여권신장을 위해 시위를 할 뿐인 데도 말이다.


나는 이 분노들을, 이 참담한 현실을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싶고 공유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관심 외의 대상이고, 들으면 불편해지는 귀찮은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친구들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게 될 까 봐 굳이 더 얘기하지 않는다. 정말 심각한 토픽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라는 걸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티 내지도 않는다. 씁쓸하지만, 그게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해가 어스름하게 지고 나면, 버스정류장에서 서로를 배웅해주고 집으로 향한다. 왠지 이런 날엔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다. 자꾸만 도돌이표를 찍는 것 같다가도, 여성 혐오 범죄 기사를 보면 다시 분노가 끓어오르고. 하루에도 기분이 여러 번 오락가락한다. 짧은 치마를 입은 승객이 타면 눈이 돌아가는 노인이 보이면 대신 째려 봐주고, 괜히 어린 여자 학생에게 다가가 자리 양보를 요구하는 중년 여성도 노려 봐주고. 그러기 싫어도, 이젠 자꾸만 눈에 보인다. 가만히 앉아 방관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버렸다. 원래 예민했던 성격이, 더 예민해져 버렸다. 이 변화에 지치는 사람은 가족도, 주변 친구도 아닌 오로지 나 자신이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 어떻게 뗀 한 걸음인데. 발을 구르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얼마나 많은 걸 후회했는데.


잔뜩 진이 빠진 몸을 이끌고 버스에서 내린다. 집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다. 우리 집은 아파트 단지에다 가로등이 잘 되어 있어서, 귀갓길이 크게 무섭다거나 공포스러울 만한 환경은 아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드는 의심과 두려움은 어쩔 도리가 없다. 버스가 다 끊긴 늦은 시간에는 괜히 전화를 하는 척하기도 하고, 우산을 챙긴 날에는 휘휘 돌리며 괜히 오버스러운 액션을 취하기도 한다. 괜히 엘리베이터까지 누가 따라올까 뒤를 주시하고, 인기척을 느끼기 위해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뺀다. 


대구는 버스가 굉장히 일찍 끊기는 편이라서, 조금이라도 귀가가 늦어질 땐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지금은 안심택시니, 카카오 택시니, 늦은 시간 탑승을 위해 편의가 제공되고는 있지만 늘 경계해야만 한다. 택시에 타자 마자 차 번호와 기사의 이름을 엄마의 카톡이나 친구의 카톡에 보내 놓기도 하고, 술에 취해 자꾸 잠에 들고 싶을 땐 억지로 깨려고 핸드폰을 만지는 척하거나 전화하는 척을 한다. 피곤하고, 괴롭다.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겪고 있는 이 불편함이 싫다. 


언제나 늦은 밤, 새벽에 일어나는 여성 대상의 범죄들. 마치 길거리에 여성이 나돌아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성추행, 스토킹, 강간, 살해, 시체 훼손, 실종. 여성 대상의 혐오범죄를 매일 인터넷 기사에서 발견하고, 죄질이 극도로 나쁜 것은 포털사이트에 대문짝 만하게 실린다. 여러 다큐에서도 사건을 조사하고 진상을 낱낱이 까발린다. 여성들의 공포는 극도로 심해지지만, 대부분의 가해자인 남성들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 내려진다.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 여성은 괴로움 끝에 자살을 선택하는데, 가해자는 너무도 잘 살고 있다. 미성년자 성폭행 범죄는 어떻고. 어린 나영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린 조두순은 출소가 채 몇 년도 남지 않았다. 잘못은 남성이 했는데, 여성은 항상 겁에 떨어야 한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성범죄, 그중에서도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를 매우 무겁게 여겨 가해자에게 내리는 형이 몇 백 년에 달하곤 한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의 법은 남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비약적인 생각마저 든다. 가해자가 남성이면, 그의 인권을 염려하지만 반대로 여성이 가해자인 경우 죄질에 비해 상당히 무거운 형이 내려지곤 한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홍익대 몰래카메라 사건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소라넷 운영자를 잡는데 무려 20년이나 걸렸다. 수많은 여성들이 몰카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경찰들은 그저 수사하기가 힘들고, 실형을 주기 어렵다는 이유로 문제들을 어물쩍 넘겨왔다. 위에서도 한번 언급했지만, 그중에서는 인터넷에 나돌아 다니는 몰카와 신상으로 인해 수치심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한 여성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몰래카메라를 찍은 남성들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다. 경찰에서 제재도 하지 않고, 처벌은 솜방망이이니 여성 대상의 몰카 범죄는 마치 범죄가 아니듯 셀 수 없이 증식했다. 잡지 않으니까, 방관하니까.


그런데, 남성의 풍기문란을 고발하려 그의 나체를 찍은 여성은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검거되었다. 여성들은 놀랐다. 몰카범죄자를 이렇게 빨리 잡을 수 있는 것이었느냐고.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몰카 범죄에는 그리 크게 동요하지 않던 언론들이 앞다투어 이 사건을 보도했다. 언론의 반응에 경찰들은 가해 여성을 포토라인에 세웠고, 범죄 현장에서 사건을 재현했고,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가해자가 남성들이었을 때와는 너무 많이 달랐다. 몰카범죄자를 이렇게 잡을 수 있었다니! 실형을 줄 수 있었다니! 그럼 이전에 그 수많은 가해남성들은?


여성들은 분노했다. 연령대도, 페미니즘의 유무도 상관없었다. 성에 따른 편파수사가 아니냐는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고, 사법권에서 행하는 분명한 성차별에 들고 일어섰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여성들은 모여서 연대했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이다. 이 한국땅에서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은 것. 젠더에 관계없이 법은 언제나 정의롭고 평등할 것. 


이런 소망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편파수사 반대 시위가 계획되던 시점에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20대의 여성이 남자 친구에게 말다툼 후에 복부를 가격 당해 숨진 사건이다. 법원은 이 가해남성이 조현병 치료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앞의 홍익대 몰래카메라 사건과는 매우 대조된다. 남성은 여성을 살해했지만 징역 4년. 여성은 남성의 나체를 몰래카메라로 찍었는데 징역 5년이다. 아무리 판결을 내리는 것이 인간이라 한들 형평성 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럼에도 성에 따른 편파수사가 아니라고 법원과 경찰 당국은 잡아뗄 수 있을까?


나 역시 여성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당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각성을 하지 않았든, 관심이 없든 다 상관없다. 나의 행보는 곧 그들을 위한 것이고, 그들의 저항은 곧 나를 위한 것이다. 지금 당장 남성의 눈치를 보는 여성들이 더 많다 하더라도, 조금 더 세상이 나아지면 깨닫게 될 것이다. 여태껏 자기만족이라 여겼던 모든 것들이 결국은 남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스스로의 용기가 부족했었다는 걸. 아무렴 상관없다. 페미니즘을 하는 여성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고, 그들의 한 걸음은 우리 모두의 열 걸음이니까.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불은 이미 붙었고,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저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좀 늦게 깨달았다는 것의 차이일 뿐이니까. 우리 모두가 끔찍하게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여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여자 친구, 누군가의 동생, 누군가의 언니, 누군가의 누나, 누군가의 친구. 생물학적 여성이라면, 그 누구든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여성이 존재하는 한, 이 저항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디딘 이 한걸음이 퇴보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감사하며, 하나 질문 던지고 마무리하겠다.


이래도 페미니즘을 하는 내가 예민충으로 보이는가?

 

예민충의 일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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