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극배우 B씨 Jun 16. 2021

쉬운 이혼은 없다

이혼 후 이야기 #.58




"... 몇 살이라고 하셨죠?"


질문을 던져놓고 차트를 훑어보던 의사가 혼잣말처럼  중거렸다.



"아.... 서른 되셨네요.

이제 건강관리 잘하세요. 소견서 써드리겠습니다.

큰 병원에 가보시고요."


13년 전

삼십 대 기념으로 받아보자 했던 건강검진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들은 것은 밤샘 근무를 끝내고 다음날 병원에 갔을 때였다.


남편보다 먼 거리에 있는 직장을 다녔음에도 아침잠 많은 남편에게 차를 주고 대중교통을 타고 두 시간 넘게 출퇴근을 하던 나는 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매 정거장마다 정차하는 버스의 흔들림에 구토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원에서 주는 견서를 받아 들고

큰 병원이 아닌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햇살이 비치는 자리에 앉아서인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반쯤 찡그린 눈으로 버스 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예전 같으면 기미가 생길까 봐 얼른 자리를 옮기던가 손등으로 해를 가리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유모차를 끄는 내 또래의 엄마가 보였다.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걷는 할머니가 보였다.

과일 트럭이 한 차선을 가로막고 있고, 과일 아저씨는 신나게 무언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암 진단을 받았는데

세상은 여전히 평화롭고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의사 앞에서

어안이 벙벙하지도, 억울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가벼운 감기약 처방받듯

건조하게 '네. 네'. 대답을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암이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건

집이란 곳에 들어가 겪어내야 하는 나의 결혼생활과 편치 않은 시어머니의 눈초리였다.



내가 보기 싫은 건지

여전히

그 여자를 만나는 건지


어쨌든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와서 겨우 잠든 나를 깨워

'당신은 엄마 자격이 없어.'

'이 집에서 당장 나가.'

라는 남편의 술주정을 하루하루 견디는 것이었다.




버스 따라

이리저리 몸이 줏대 없이 흔들다.


암이라고?
...

내가?

버스가 좁은 동네길을 벗어나자

좀 전에 의사가 내려 준 진단이 떠올랐다.


헛웃음이 '풉'하고 나왔다.


그 와중에 머릿속으로 계산기가 돌아갔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어차피 누가 걸려도 걸릴 것이라면

우리 가족 중에 내가 암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남편이 암에 걸렸다면 

저 사람은 나보다 심하게 좌절하고 방황했을 거야.

정신 못 차리고 세상 끝난 것처럼 낙담했을 거야.


그리고 나보다 월급도 많잖아.

애들은 돈이 있어야 키우니까...


내 아들, 우리 남동생이 왜 암에 걸렸냐고 어머니와 시누들이 아우성치고

나는 건강해서 죄스러운 아내가 되는 거니까.

...

그래, 차라리 내가 암에 걸린 게 낫지.


하나님은 어쩜 이렇게 현명하실까?

우리 중에 그나마 견딜만한 사람이 누군지 아시고.'



혼자 병원에 가서 암이라는 결과를 받아 들고서도 나는 집안 분위기와 시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저 다행이다, 다행이다라는 말을 되뇌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암에 대해 검색을 한 뒤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에 예약을 했다.


수술은 빨라야 3개월 뒤였다.

수술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시누가 전화를 했다.


하나님한테 기도 먼저 드려야지,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기도도 안 해보고 수술 날짜부터 덜컥 잡냐고 나무랐다.




암수술과는 상관없이 명절이면 우리 집에 여전히 모였고 주말이면 시댁 모임을 가기 위해 운전을 하고 다녔다.


나를 의식한 듯 1층에 내려가서 담배를 피우던 남편은 이내 베란다에서 다시 담배를 물기 시작했다


남편과 그의 엄마, 누나들이 나를 투명인간 보듯 하는 이 집안에서 더는 살기가 싫었다.




살려면,

내가 죽지 않고 살려면

이 집을 나가야 하는데 학교도 안 들어간 아직 어린 두 아이가 눈에 밟혔다.


나 살자고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책임감 없이 집을 나가자니 그 이후론 아이들을 영영 못 볼 것 같았다.



남편은 아이들을 주지 않을 것이 뻔했고, 아이들을 보려면 지옥 같은 이 집에 꼬박꼬박 들어와야 했다.


탈출하고 싶은데 탈출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세탁기가 있는 보일러실 배관에 목을 매서 죽자는 계획이 서자 퇴근 때마다 압박붕대를 하나 둘 사 오는 나를 보았다.



무서웠다.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실행할까 봐 무서웠다.



죽고 싶지만 겁은 많아서

행동을 저지르는 를 보는 공포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실행을 늦추고자 병원에서 받아 온 항우울제는 효과가 있었지만 그 대신 끝도 없는 무기력을 나에게 주었다.



자고 또 잤다.



자고 일어나면 개운해야 하는데 잠을 깨면 그 지옥 속에 여전히 나는 덩그러니 있었다.


밥은 삼키는데 거짓말처럼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잠들 때마다 호흡처럼 울음처럼 한 가지 말만 되풀이했다.


'엄마... 엄마아...'





그래, 이혼하자.

더 이상은 여기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어.

우리 엄마가 행복하게 살라고 낳아주신 건데 내가 보일러실 배관에 매달려서 마지막을 맞는 건 너무 한 거지.


그럴 거면 차라리 살자.


여기선 딱 죽겠으니까 그만 이 집에서 나가자.




죽는 것이 지금 이 시간을 견디는 것보다 훨씬 편할 거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가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외면했던 이혼을

결심했다.


희미했던 '이혼'에 대한 막연한 상상과 구체적인 계획이 안개가 걷히듯 점점 내게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급한 불은 이 공간에서 탈출하는 것 하나였다.

그것도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이 도와준 것일까.


마침 남편의 술주정은 잠옷바람의 나를 이웃들이 보는 앞에서 질질 끌고 다니다가 창문 밖으로 밀 어죽이려는 상황까지 만들었고 이혼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생활비, 양육비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이만 데리고 나가는 것에 일단 합의를 했다.


그래도 자유가... 내 삶의 자유가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대용량 생필품이나 미리 사서 쟁여두었던 할인 품목들을 사지 않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이 집을 나가기로 결심하자

집안의 모든 것에서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나간 후

우리의 그 어떤 흔적조차도 남아있지 않길 원했다.



안방 행거에서 내 옷가지를 빼냈다.

짝이 없던 양말 하나까지도 챙겼다.

화장품, 내 신발도 박스에 담았다.



결혼할 때 한두 번 입었던 새색시 한복을 재활용 의류수거함에 넣었다.


쓰레기 봉지에 넣으면 그 고운 색들이 너무 선명하게 잘 보일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밤에 가지고 나와 수거함에 집어넣었다.



이 한복을 누가 입기라고 할까.

이곳에 버린다는 것이 그 어떤 누군가에게는 미안했다.

제발 쓸모없는 옷으로 분류되어서 불태워지기를... 기도했다.



내가 받아보던 간행물도 끊었다.

내 앞으로 오는 우편물들은 주소를 바꾸거나 이메일로 변경했다.

자주 가던 동네 마트 마일리지를 더 이상 적립하지 않았다.

알뜰하게 적립하던 마일리지는 아이 과자를 사면서 써버렸다.



이혼 전 살았던 집은 오래된 아파트였다.


집안 살림에 정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퀴벌레가 낮에도 돌아다녔다.



시어미 먹을 음식에 독이나 넣을 거면 주방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엄포가 있어서 집에서 밥도 먹지 않았던 때였다.


가끔 아이들 견학 도시락을 싸거나

과일을 썰어줄 때나 주방에 갔지만

슬금슬금 기어 다니는 크고 작은 바퀴벌레들을 보아도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안개가 뿌옇게 내린 풍경으로만 기억이 되었다.




동네 세탁소에 가서 맡겼던 옷들을 찾아왔다.

"안녕히 계세요!"

평소보다 힘주어 인사를 건넸다.



어머니의 권유로 다녀야 했던 교회는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내가 속해있던 모임의 구역장님이 몇 번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교회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밤낮으로 교회에 가서

'며느리가 속히 마음을 잡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라고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는 걸 온 교인들이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좋은 시어머니와 남편 만나 잘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한 권사님네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내가 나가던 이사 날, 이른 아침부터 교회 부목사님이 집에 오셨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드리는 나를 쌩하고 지나쳐 어머니 방으로 곧장 들어가서 어머니와 함께 통성기도를 하는 목사님이었다.


어머니가 와 달라고 요청하셨던 모양이었다.


이삿짐을 싸는 업체 사람들의 분주함과 어머니가 통곡하는 소리와 가정만은 지키자던 나의 부탁을 한 번에 거절했던 자신만만하던 남편의 침묵이 묘하게 화음이 되어 집안에 머물렀다.





이혼을 하기 위해선 철저하게 혼자 살아가야 함을 사전에 각오해야 했다.


결혼이

부모 되는 것이

예행연습이 없었듯


이혼 또한 홀로서기 전 유예기간이나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이사 후 정리되지 않은 짐처럼

결혼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마음이 치유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낯선 환경을 정신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괜찮은 척' 해야 했다.



주변에도 괜찮은 척해야 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 앞에서 의연해야 했다.


당장 키워야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다면

엄마로서의 역할 말고는 모든 것이 사치가 되었다.



나는 여자도 아니었고

딸도 아니었고

그저 엄마이자 아이들의 보호자로서만 존재해야 했다.


그러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마음의 여유공간은 더 부족했다.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던 건

'이혼해서 혼자 사는 것이' 내가 결정한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원인제공을 하였든 누가 더 나쁜 사람이든 상관이 없었다.



아빠랑 살게 그냥 두고 나왔어야 했나...

적어도 아빠랑 살면 할머니도 고모도 볼 수 있는데, 지금보다 더 잘 먹고 클 텐데 익숙한 집에서 자기 방에서 잠들고 잠 깰 수 있는데 내 욕심만 부렸나.

이게 과연 아이들에게 맞는 건가.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집안에 불을 끄고 나면 온갖 잡념과 불안함이 뒤섞여 머릿속을 하얗게 밝혔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늘 멍한 상태에서 일어나 아이들 등교 준비와 나의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얼마 되지 않은 비정규직 월급을 손에 들고 매일 저녁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


저축은커녕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아이들을 전쟁터로 끌고 나온 느낌이 들어 온몸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아빠한테 돌려보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절대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나는 매주 아빠를 만나러 가도 된다고 했고 꼭 보내주었지만, 남편이 키운다면 아이들은 를 못 보고 클 것이 뻔했다.


남편은 불쌍한 아이들보다

나를 괴롭게 만들기 위해

후회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보여주지 않을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내가 붙들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가며 흘러 흘러온 십 년이었다.




그동안의 일들이 바로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십 년이 지났다.




쉽게 하는 이혼은 없다.


이혼에는 하찮은 이유도


섣부른 결심도 없다.



행복한 웃음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결혼 생활을 끝낸다는 것은 싫든 좋든 남들 눈에 내가 살아낸 많은 시간들을 부정당하는 경험이다.



요즘 사람들은 툭하면 이혼하지


요즘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이혼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십 년 전의 나는 참을성이 없었구나 싶어 씁쓸하게 웃는다...^^




'툭'하면 할 수 있는 게 이혼이었다면



나는 차라리 좋았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