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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연극배우 B씨
Dec 27. 2021
그렇게 울 거면 왜 이혼 소송했어?
이혼 후 이야기 #. 63
이혼하기로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지 3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대학 졸업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위해 서류상으로라도 가정을 유지하겠다는 내 생각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생활비나 양육비를 보내지 않은 전남편에 대한 괘씸함으로 바뀌어 갔다.
남자보다 못 벌면서 아이들 떠안았으니
양육비는커녕 앞으로도 돈돈 거리지 말라는
전남편의 문자가
늘 명치에 박혀있었다.
그 사람 입장에선
어떤 명목으로도 주기 싫은 돈이지만
내 계좌로 보내야 하기에
더욱 싫었을 것이다.
대화와 협의가 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지게 하는 책임,
내게 방법은
이혼뿐이었다.
나는 고작
31살 젊은 엄마였다.
아이들을 위해
서류상으로라도 가정을 유지하겠다고,
혼자 벌어서라도 아이들 다 키워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서른 초반이었던 나는
'이혼녀'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서류상으로라도 남편이 있고
'남편은 다른 지역에 근무하고 있어요.'
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불안했던 직장과
얇아서 곧 끊어질
삭은 털실 같은 내 삶을
의지하고 있었다.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이어가긴 싫어서
살고 싶어서 나왔지만
한편으론
'난 이혼한 여자가 아니야.
우리 아이들은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아니야.'
라며 위안을 삼고 싶었던 것이다.
두려웠다.
혼자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혼자라는 것을
남들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 학년씩 올라갈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 생각을 전달했다.
양육비
아니
생활비 일부라도 부담하라고.
답은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돈돈거릴려면 애들 보내라는 답장.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능력도 안되면서 애들 데려갔냐? 한심하다.'
라는...
어쩌면 내가 스스로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마주하기 싫은
자신 없는 감정.
그럼에도 더 이상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용기를 꾹꾹 쥐어짜 내
최후통첩하듯 문자를 보냈다.
"변호사 준비해, 법원에서 봐 그럼."
아이들이 잠들면
인터넷으로
이혼 전문 변호사를 밤새도록 검색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독한 변호사를 찾고 싶었다.
나 대신 저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판결을 끌어낼 수 있도록
최대한 독하고 독한 변호사여야 했다.
어떻게든 이겨야 했다.
고심 끝에
한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남자들은
애들 아빠처럼 다 똑같다는 생각에
여자 변호사를 찾았다.
직장에서 휴가를 내 서울로 갔다.
변호사 사무실이 즐비한 동네였다.
겁을 잔뜩 먹은 채 사무실로 들어갔다.
상담이랄 것도 없었다.
몇 가지만 물어본 뒤 변호사는 짧게 대답했다.
"진행하시죠."
그동안의 결혼 생활과 현재의 내 고통을 이야기하면 눈물 꽤나 쏟겠다 싶어 챙겨간 손수건이 무색했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이혼소송 의뢰인 중 한 명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혼소장을 쓰기 위한 자료를 달라고 연락이 왔다.
자소서도 그렇게 상세히 쓴 적이 없던 나는
며칠 동안 자서전 작가가 되어야 했다.
문자메시지, 이메일, 카드 사용 명세서, 진단서, 경찰서 서류 등 증거서류로 제출할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내 억울함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전남편도 변호사를 선임했고
[누워 침 뱉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누가누가 더 억울한가 대회]가 시작되었다.
나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 상대방의 반소장이 올 때마다 손이 벌벌 떨렸다.
눈물이 마구 흘렀다.
내가 아프다고 한 것들이
조롱거리로 변해서 돌아왔다.
내가 힘들다고 한 일들은
참을성 없는 못된 여자의 푸념으로 바뀌어서
돌아왔다.
위자료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대로만 써서 반박했다.
내 보험금과
아이들의 밀린 양육비와
미래 양육비만 보장받으면 그만이었다.
각자의 변호사를 앞세운 채
서로에 대한 창 던지기는
끝이 없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와중에
가정법원의 부모교육을 받으러 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휴가를 냈다.
"저.... 부모교육받으러 오라고 해서 왔는데요..."
주춤거리며 다가간 안내 데스크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으로 가세요.'
무미건조한 손가락질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웃으면서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하던 직원들이 내가 들어가자 입을 다물고 각자 모니터를 쳐다봤다.
'내 이야기를 한 건가...?'
괜한 자격지심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곳에도 와보는구나...
인적사항을 말했다.
내가 왜 왔는지 알겠지,
아니 하루에도 수십 명일 텐데. 그중에 나도 한 명인가?
한 공간에 칸막이가 쳐있고
큰 화면의 tv가 있었다.
앉아서 시청하면 된다고 했다.
더 이상이 설명도 질문도 없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귀를 닫고 마음을 닫고
그저 시간만 때우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화면이 켜졌다.
공익광고에서처럼
엄마, 아빠, 아들, 딸이
푸르고 싱그러운 잔디밭에서
빨간색 노란색 풍선을 손에 잡고 뛰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아이들은 너무 행복해 보였고
부부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 뻔한...
지금 여기 앉아있는 나에게
아니 수십수백 쌍의 이혼하는 사람들에게
'반성해.'라는
메시지라도 주는 건가.
화면에서 나오는 소리가
사무실 공간에 울려 퍼졌다.
지금 이 시간에 나 혼자라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상처 받는다는 내용, 이혼하지만 엄마 아빠는 아이들의 부모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들이 나왔다.
내가 직장을 옮길 때마다
친했던 친구들과 익숙한 동네를 등진채
또 낯선 곳으로 전학을 해야 했던 아이들이
화면에 겹쳐서
떠올랐다.
그래도 엄마 옷자락 하나 붙들고
나 하나만 쳐다보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화면을 볼 땐 아무 감정도
더 흘릴 눈물도 없었는데
아이들이 떠오르자
고구마를 삼킨 듯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울지 않으려고 숨을 크게 쉬었다.
시야를 가리기 시작하는 눈물이 빨리 마르라고
괜스레 눈을 굴리고
부라려보았다.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울 거면
왜 이혼소송을 했어?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말했다.
"꼴좋다. 그러길래 참고 살지 왜 나왔니."
"쉽지 않지? 아무나 이혼하는 줄 아니?"
"애들은 혼자 어떻게 키울 건데? 대책은 있니?"
"애들은 뭔 죄니. 너 혼자만 나와서 고생하던지 해야지."
"아빠가 더 많이 버는데 굳이 데리고 나온 건 네 욕심 아니니?"
아무 말 대잔치를 하듯
온갖 환청이
파리떼처럼
내 주위를 윙윙 날아다니고 있었다.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떨구면
내가 지는 것 같아서
내 선택이 엉망이 될 것만 같아서
지나온 시간들을 통째로 부정당하고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아서
애꿎은 화면을 노려보고
또 노려봤다.
내가
견뎌야 하는 것들이었다.
지나가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감정이라면
그래
얼마든지 감당해주마
마주 보고 감당해줄게.'
충혈된 눈과
명치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매단 채
다행히 울었던 티를 내지 않고
무사히 부모교육을 다 받았다.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왔다.
직원들이 허겁지겁 나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몇십 미터 안 되는 그 거리가 천 길 만 길 같았다.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아야 하는데
고무망치로 무릎을 내리친 것처럼
오른발이 덜덜 떨렸다.
저 안에서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오래 참았던 소변 나오듯
줄줄 흘러내렸다.
누구 편하자고, 뭐 좋자고 내가 여기 있는 걸까.
맞는 걸까.
이게 맞을까.
내 욕심일까.
괜히 소송한 건가.
이길 수 있을까.
누가... 누가 대답 좀 해주세요
제 생각이 맞는지 누가 제발 말 좀 해주세요
자기 등보다 더 큰 가방을 둘러메고
운동화를 신고
씩 웃어 보이며 학교 가던 둘째 아이가 생각났다.
엄마 아빠, 동생까지 살갑게 그린 큰아이 그림이 떠올랐다.
아빠와 시간을 보낸 뒤
들어서는 현관에서부터
눈두덩이가 빨갛게 된 채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돈돈 거리지 말고
못 키울 거면 애들 보내라는 남편의 빈정거리던 문자가 생각났다.
가사조사관과의 면담
몇 번의 법원 출석
남편보다 괜히 더 미웠던 상대측 변호사...
법원을 오고 갈 때 보았던
스산한 가로수, 그 앙상했던 기억
....
수많은 밤들이 지나고
아침이 다시 오고
나는 이혼한 여자라는 타이틀과
아이들의 '양육비'를
가져왔다.
그것을 얻기 위해
지난 결혼생활의 모든 기억과
부부의 치부와
나 혼자만 이해하는 애달픔과 눈물을
처음 보는 변호사와 판사에게
세세하게 소개해야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이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걸린 듯
'흠칫'하는 느낌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들과 대화할 때도
부모의 '이혼'이
금기어가 아닌 시간이 되었다.
법원 화장실 맨 끝 칸에서,
차를 세운 구석진 골목에서
혼자 울고 있었던 나는
'지나 보니
이혼,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내 삶이 훨씬 더 중요해.'
무심하게 중얼거릴 정도로
마음 근육이 생겨가고 있다.
그래, 어쩌면
11년 전의 내 선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신념이나 자녀를 위해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또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겐
내가 이기적이고
무모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남들에게 '보이는' 것 때문에
내 삶에 가짜 옷을 입혀가며
살고 싶진 않다.
수없이 고민한 것도
남몰래 울었던 시간도
이혼을 결정한 것도
혼자서 감당할 것들을 해나가며
아이를 홀로 키우는 것도
모두 다
내 소중한 시간이고
그 자체가 나 자신이며
아름다운
내 삶이기 때문이다.
아흔 살쯤 되었을 때
거실 창 밖에 걸린 석양을
느린 시선으로 따라가며
얇은 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나는 말할 것이다.
잘 살아왔고
잘 살았어
그때 너,
용감했어
지금은
전남편보다 월급도 많고
아이들과 여전히 복작복작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조금씩이나마 자산을 모아가고 있다.
'돈돈~'거리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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