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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Dec 25. 2022

모를 줄 아냐, 엄마 울 때 너도 우는 거?

# 69. 엄마의 수술




"내가 오죽하면 수술한다고 돈 싸들고 내 발로 찾아오겠나."



엄마의 이유는 간단했다.


쇳덩어리 무릎연골을 장착하고서라도

'뭘 더 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일이든 무엇이든

그만하고 싶은데


무릎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다.

 


아프다고

아파죽겠으니 그만 부려먹고

이제 좀 쉬게 해달라고

밤마다 야단이더니

이제 낮에도 힘들다고 했다.



엄마는 간병사 일을 퇴직하며 받은

얼마 되지 않은 퇴직금을 싸들고

무릎수술을 받으러 왔다.


평소에 아프다 말하는 법이 없는

그 강한 양반이,

손수 말이다.








공항에 엄마를 모시러 나갔다.

연이어 도착한 비행기에

여행용 가방을 하나씩 들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엄마를 어떻게 찾지?'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누가 봐도 다른 사람들보다

확실히 느린 걸음으로 절뚝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시골 할머니.

우리 엄마였다.


젊고 걸음 빠른 사람들이

느린 엄마를 앞질러서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엄마!!"


"어이구, 니 나왔드나!"


엄마의 걸음이

유난히 더 느린 이유가 있었다.


딸과 손녀가 잘 먹는다고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새벽부터 떡집에 가서 떡을 해온 엄마였다.



겨울점퍼 하나만 잠시 들고 있어도

나는 팔이 아픈데


엄마는 바퀴가 달린

여행용 가방도 아니고

운동선수들이 어깨에 메고 다닐듯한

큰 가방에

뭔가를 잔뜩 넣어왔다.



"별거 안 해왔다. 그냥 가래떡만 쪼매 뽑아왔다."



집에 와서 풀어보니

가래떡과 송편, 절편, 인절미, 콩떡...


그리고 손녀들이 잘 먹는다는 이유로

칼국수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콩가루를 뿌리고 그걸 또 썰어서

두통이나 담아 오셨다.


엄마가 텃밭에서 기른 쪽파를 뽑아

국수 양념장을 같이 만들어 온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입원하기도 전부터 엄마는

나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엄마. 여기 와서 수술하세요.

서울 가봐야 언니도 집이 멀고

누가 간호해 줄 사람도 없잖아."



아무래도 이 무릎이

도저히 그냥은 두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는

엄마와의 통화 끝에

나는 아껴둔 연차를 탈탈 털기로 했다.


평소의 나 같으면

직장에 눈치를 보며 휴가를 썼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우리 엄마가 아프다는데

보호자가 필요하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망설이기 싫었다.




휴가를 내고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



병원에서 엄마의 무릎과 연골은

수술밖에 방법이 없는 4기라고 했다.



수술 전 검사를 하고

엄마는 환자복을 갈아입었다.


똑같은 우리 엄마인데

환자복을 입으니

갑자기 노인이 된 것 같았다.



"... 아프면 어떡하지?"


내일 있을 수술에 대한 안내를 받고 나서

엄마는 중얼거렸다.



엄마딸로 커오면서

엄마가 특히 당신과 관계된 것에

미리 염려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철인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환자복을 입고 링거바늘을

꽂은 엄마는

여리고 여린 작은 아기새 같았다.




"엄마, 마취하면 아무 느낌도 통증도 없을 거야. 그냥 한숨 주무신다 생각하면 돼요."


엄마를 차가운 수술실로 들여보냈다.



3시간여를 수술방에 있다가

병실로 올라온 엄마는

마취가 깨면서 엄습해 오는

무시무시한 통증과 만났다.


진통제가 들어가고 있었음에도

간호사를 불러 진통주사를 또 맞아야 했다.



내가 옆에 있어서일까

엄마는 입을 꽉 다물고

우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조용히 누워있는 엄마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

흰 베개에 점점 번졌다.



그 옛날, 육 남매를 무통주사 한번 없이

집에서 출산한 엄마가

'아프다.'며 울고 있었다.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자

겁이 덜컥 났다.




지금 엄마에겐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는 딸 말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간절하게 필요할 것 같았다.


엄마도 무섭도록 아플 땐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을까...


 

어쩔 줄 몰라서 나는

잔뜩 겁을 먹고 서 있었다.



울고 있는 엄마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엄마는 수술한 지 3일 후부터

재활실로 보내졌다.








진통제를 맞으며 침대에서 울던 엄마는

그나마 나았다.



재활치료를 시작한 엄마는

퉁퉁 부은 무릎을 재활기계에 묶인 채

비명을 질렀다.



수술한 무릎은

약간의 각도만 굽혀도 힘들어했다.




병실에서 다리를 조금만 스쳐도

아프다고 하고

휠체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짜증을 내던 엄마랑

하루종일 지내던 나는,


재활치료 첫날

엄마 비명소리에

'또 엄살이시네.'하고 대기실에 앉아

빙긋 웃었다.


약간 고소했다.


통증에 우는 엄마가 가엾다는 생각은

잠시 뿐

마흔이 넘었어도 여전히 철없는 나는

평소에 어디가 아프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엄마의 그런 모습이

유난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가지 않아 나는

벌을 받았다.



환자복과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핼쑥해지도록 재활을 견딘 엄마가

복도로 나오면서 우는 것을 봐야 했다.


땀으로 젖은 환자복을 입고

입을 앙다문 채 복도를 지나서

엘리베이터 앞에 선 엄마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정말 엉엉 울었다.



오후에도 울면서 재활실을 나왔고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엄마는 울면서 재활실을 드나들었다.

날마다 조금씩 강도가 높아지는 재활에

엄마는 매일 비명을 지르고 울었다.


잠시 엄마를 재활실에 들여보내고

책이나 읽을까 여유를 부리던 나는

엄마가 그 안에서 울 때

재활실 옆 대기실에서

같이 울고 있었다.


엄마가 우는 소릴 듣는 것이

이렇게 괴로운지 몰랐다.



엄마가 아프다고 할 때

쌤통이라고 생각해서

고소하다고 웃어서


내 무릎은 아프지도 않지만

자동으로 눈물이 쑥쑥 나오는

벌을 받는가 보다.




재활시간이 끝나면

신발도 못 신고

통증에 덜덜 떨고 있는 엄마 앞에

쭈그려 앉아

뽀얀 환자신발을 신겨드렸다.



엄마는 무릎통증에 울고

나는 퉁퉁부은 엄마의 발을

신발에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울었다.


죄송함과 죄책감을

같이 꾹꾹 구겨 넣었다.



엄마의 무릎은

수술 전부터도 굽혀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나쁜 상태였다고 했다.


그 굽혀지지 않은 각도까지

재활치료를 하다 보니

통증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왜 진작

왜 조금이라도 덜 아플 때

수술시켜드리지 못했을까

왜 이지경까지 오게 그냥 뒀을까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라는 말,


왜 그동안 정말이라고 믿었을까

왜 그렇게 나는 게을렀을까...



후회가

원망이

아쉬움이

너무나 큰 죄송함이 뒤섞여

콧물과 함께 주욱 흘렀다.





엄마와 나만 있었던 엘리베이터 안에는

엄마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엄마 뒤에 말없이 서 있었다.




...

그래. 울자 엄마.

그냥 울고 싶으면 울자.




우리 엄마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고단했던 삶과

말할 곳 없고 기댈 곳 없던

황량했던 지난날에게


언제 한 번이라도

속시원히 비명을 질러봤던 적이 있었을까.

통곡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을까.



아프다고

아파죽겠다고

소리 질러 본 적이 있기나 했을까...





엄마의 재활 시간은

매일매일 나도 울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무릎수술하고 약간의 재활을 거쳐

퇴원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병원직원을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

조금 더 입원하더라도

재활을 충분히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고향에서는

엄마가 재활을 다니는 길이

어렵고 멀고 힘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재활치료와 물리치료의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엄마와 함께 병원에서 맞이하는

매일 새벽,

나는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오늘은 제발

착한 딸이 되게 해달라고


오늘은

엄마의 통증을 이해한다고

얼마나 아프냐고

다정하게 말하는 딸이 되게 해달라고.




주문은 크게 소용이 없었다.



아프다고 하는 엄마에게

겁난다고 하는 엄마에게

이걸 이겨야 무릎 각도를 더 좁힐 수 있는 거라고

다 엄마한테 좋은 거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못된 딸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루 두 번,

엄마는 재활시간이 다가오면

오늘은 울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진통 주사를 맞고 힘차게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돌아올 땐

환자복과 머리가 땀에 홀랑 젖고

두 눈이 뻘게진 채 들어왔다.



다음날에도 또 다짐을 하며

기운이 있어야 비명도 지르고 우는 거라며

텁텁했을 병원밥을

싹 비우고 호기롭게 나섰다.


그리고는

또 울면서 들어왔다...




엄마는

병실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만

울었다.


병실 앞에서 눈물을 쓱 닦고

아무렇지 않게 들어왔다.



재활실에서 고난을 당한

퉁퉁 부운 무릎에 냉찜질팩을

올려주면

말없이 무릎 위에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엄마가 우는 것보다

조용히 한숨 쉬는 것이

더 슬펐다.





무릎 굽히기가 어느 정도 되자

재활자전거를 병행했다.

헬스장에서 보는 그런 자전거였다.



나에게 '실내 자전거'란

살 빼고 싶다면서도

러닝머신조차도 하기 싫을 때

편하게 앉아서 페달만 밟으면 되는

헬스장 기구였다.


엄마에게도 '자전거 타기'는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자전거 탈 줄 아냐고요? 아이고 선상님, 그건 내가 자신 있지요!"



엄마는 30년 전

마흔을 갓 넘겨 혼자가 되었을 때

읍내로 식당일을 다니기 위해

뒤늦게 자전거를 배웠다.


세발자전거를 졸업하고

두 발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똑같이

넘어지고 부딪히고 멍들면서 배웠다.


엄마에게 자전거는 자신의 두발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재활용 실내자전거 위에서도

엄마는 또 울어야 했다.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무릎의 각도가 강제로 굽혀지면서

엄마는 힘들어했다.

재활실에 엄마의 신음소리가 가득했다.




남편도 없는 가장의 삶,

아직 자고 있는

올망졸망 도토리 같은 자식들만

집에 남겨두고



수많은 어두운 새벽

출근길을 재촉하면서

자식 걱정, 앞날 걱정에

읍내로 가는 길목마다 눈물을 뿌리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을 엄마인데



세월이 이만큼 지나고

무릎은 더 이상 닳을 것도 없는

상태가 되고 나니


이제는 재활 자전거 위에서

눈물을 뿌리며

통증과 싸우고 있었다.




"환자분, 오늘은 10분만 자전거 타보세요.

좀 아파도 앞으로 바짝 앉으시고 타셔야 해요."


재활선생님의 말에

엄마는 유치원 가기 싫은 아이처럼

환자복 소매로 눈가를 훔치면서도

느리게 느리게

재활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21분을 탔다.




엄마는

울면서도 두배로 자전거를 탔다.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재활이 끝나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오며 말했다.



"내가 모를 줄 아냐, 엄마가 재활실에서 비명 지르면서 울 때 너도 우는 거."


"아니거든? 나 안 울었거든요?"


발연기를 했다.

... 아마도 완벽했을 것이다.





엄마가 재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보호자용 간이침대가 없는 병원이었다.


보호자들은 낮에도 이불을 바닥에 깔고

누워서 쉬었지만

나는 새벽에 일어나면 돗자리를 접고

의자에 앉았다.


뭉툭하게 닳아 있는 엄마손을 주무르고

발바닥을, 어깨를 주물렀다.

내가 그나마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지금 아니면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엄마가 잠시 잠들었을 때

병원밑에 있는 약국으로 가서

작은 파스를 사 와

화장실에 가서

목과 어깨에 파스를 붙였다.



엄마가 파스 붙인 걸 봤나 보다.

딸 눈에 실핏줄이 터진 것을 봤나 보다.



엄마는

새벽 4시에 복도로 나갔다.



남들 다 자는 새벽에

보조기구를 밀고 다니며

혼자 걷는 연습을 했다.



수술한 무릎을,

이놈의 굽혀지지 않고 아프기만 한 무릎을

얼른 구부러지게 만들어서


혼자 다닐 수 있고,

머리 감을 수 있게 되면

딸을 얼른 집으로 보내야겠다 생각했을까.




병원에서도 엄마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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