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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Dec 26. 2022

딸아. 살면서 말이다.

# 70






엄마는 입원하기 전에

치매환자들이 쓰는

일회용 성인 기저귀를 사자고 했다.



"엄마가 거동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화장실에 내가 데려다줄게 엄마."


"잔말 말고 사와라. 팬티 일일이 빨아 입기도 귀찮다."




입원한 엄마가 속옷을 빨겠는가.

결국 딸이 할 것을 알고 있었다.


딸이 당신 속옷까지 빨며 간호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간병사로 일하며 수많은 노인환자의

대소변 기저귀를 받아냈던 엄마다.


다 큰 어른이 일회용 기저귀를 쓴다는 건

어쩌면 너무 부끄럽고

무기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당신 고집대로

속옷을 곱게 가방에 넣어두고는

퇴원하는 날 아침에서야

일회용 기저귀를 벗고

팬티를 꺼내서 입었다.






엄마와 병원에 있으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 머리를 감겨드렸다.


환자용 목욕의자에 엄마를 앉혀놓고

샤워기로 조심조심 머리에 물을 뿌렸다.


내가 알던 것보다 엄마 머리는

참 작았다.

풍성했던 머리카락이

수건 몇 번 비빌 것도 없이

드문드문 남아있었다.




엄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메말라 거칠거칠한 

발을 씻겨드렸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비누거품을

문질렀다.




엄마는 발도 작다.



몰랐는데

머리도 발도 어깨도

모든 게 다 작아져있다.




엄마가 늙고 입원을 해서야

처음으로 머리를 만져봤고 

발을 씻겨드렸다.



엄마도 나도

말이 없었다.




넓고 휑한 샤워장엔

물줄기 소리만 났다.




다행이었다.


철없는 딸이 훌쩍이는 소리

그 소리가  묻힐 수 있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수술 한 다리의 상태는

매일매일이 달랐다.


붓고빠졌다를 반복하는 다리 통증 앞에서

엄마는 좌절과 희망을 매일 반복했다.




"병원에서 시키는 운동만큼만 하니까

의사 선생님 회진 때나 재활실에서나 

다리 만질까 봐 두려운 거야.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쳐다보기로

한 것 같았다.


아파서 피하고 싶었던 것을

더 이상 피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엄마는 재활실에서 울고 나오면서도

좀 더 효과적으로 운동할 궁리를 했다.


외래진료가 끝난 어두운 1층 로비에서

혼자 걷고 또 걸었다.




새벽에도 밤에도

병원 복도를 걸었다.


아프다면서 뭘 자꾸 걷냐는 타박에

수술했으니

지금은 움직일 때마다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어떤 것은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그런 것은 그냥 견뎌야 한다고 했다.





"아유~ 무릎수술하면 병원에서 살이 쪄서 나가는 게 보통인데 그 집 어머니는 살찔 시간도 없어요. 

저렇게 하루종일 나가서 돌아다니니 살찔 틈이 없지, 없어."

병실 환자분이 혀를 내둘렀다. 




우리 엄마는 

결국 성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될 때까지 하기 때문이다. 

멀어도 끝이 날 때까지 하니까.


끝을 보기 때문이다.








"그 집 모녀는 어쩜 그렇게 틈만 나면 소곤소곤해요?~ 할 말이 어쩜 그렇게 많아요?"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는 

건너편 아주머니 환자분이 

웃으면서 물었다.


딸이 제일 부럽다고, 

엄마랑 저렇게 하루종일 이야기

할 수 있는 딸이 정말 부럽다고 하셨다.



칠십이 넘었는데도 

아직 귀가 밝은 엄마 덕분에 

우리는 작은 소리로도 온갖 이야기들을 

오래 할 수 있었다.



엄마랑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틀어막기도 했다.





재활이 조금은 수월했던 오후.

'울지 않고' 재활을 다녀왔던 엄마와

병실 침대에서 과자를 먹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카라멜콘과 땅콩'이었다.




우물우물 과자를 녹여먹던 엄마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너도... 살면서 말이다."


"응?"


"너도 살면서 돈만 너무 벌려고 하지 말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무릎관리도 하고 즐기면서 살아라.


나는 이렇게 살다가 가지만 너는 그러지 마라.


좀 더 즐기고 좋은 거 많이 보고... 그렇게 살아라."




사는 게 너무 바쁘고 힘들다는 엄마 입에서 나온 가장 낯선 말이었다.


평소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편해빠진 사람들이나 하는 배부른'

소리였다.




한평생 일하고

이제 직장도 그만둬서

꽃이나 심어가며 편하게 지내볼까

했는데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치열하게 달리고

무조건 이겨내고

될 때까지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 한 나에게



엄마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즐기면서 살 거야. 난 엄마처럼 그렇게 안 살아 뭐."


"... 빈말 아니다. 

엄마 말하는 거 잘 들어. 

너무 애쓰지 마라, 

너무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







엄마가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집에 가는 날이 되었다.



병원비는 결국

엄마의 고집대로

당신 퇴직금으로 정산을 했다.


자식들이 몇인데 

엄마수술하나 못 시켜드리냐고

입원 전부터 신나게 싸웠지만

결국 엄마 뜻대로 했다.





병원밥이 질릴까 봐

반찬을 해오겠다는 것을 극구 마다하고

엄마는 입원 내내 병원식만 먹었다.


아파서 나으려고 병원에 왔지, 

딸한테 반찬해오라 뭐해오라 시키며

호강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환자복을 벗고


엄마가 올 때 입었던 외투를 입혀드리고

뜨끈뜨끈한 돌솥밥이 나오는 식당에 갔다.



뚝배기에 나오는 해물순두부와

물을 부어 김이 솔솔 올라오는

돌솥 누룽지를 다 먹는 엄마.



"참 맛있다, 이거."




엄마를 모시고 시골로 가는 날에 맞춰

재활 자전거를 주문했다.

비싼 것도 아닌데 재활 자전거마저도

굳이 당신 돈으로 하겠다는 엄마.


엄마한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동안 주인 없이

썰렁해진 엄마방에 보일러를 켜고

자전거를 조립해 침대 근처에 놓아드렸다.



반신욕 욕조도 도착했다.

사용방법을 알려드리고

욕실에 설치했다.




마트에 가서

당분간 외출이 힘들 엄마가 필요한 것을

이것저것 사 왔다.





다음날 새벽에 목욕탕에 모시고 가서 

엄마 등을 밀어드렸다.


병원에서 간병사로 일할 때 

혹시나 당신이 코로나에 걸려

피해를 줄까 봐

3년 넘게 오지 못했던 

목욕탕이라 했다.




엄마등에 때가 많았으면 했다.


많으면

오래오래 밀수 있으니까


그 핑계로

오래오래 엄마 등을 만질 수

있으니까.



엄마는 때도 별로 없었다.

나는 소시지 같은 때가 둘둘 밀려 나오는데

엄마등은

그냥 엄마같이 핼쑥해져있기만 할 뿐이다.



 




"무릎이 아프니까 안 나간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조심해서 올라가고."



엄마는 늘 

집 앞 주차장까지 나와서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줬는데

이젠 집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엄마를 또다시 두고 올라와야 했다.





"나 갈게요 엄마."


신발을 신고 거실문 앞에서

혼자 남겨질 

작아진 엄마를 안았다.


얇고 보드라운 흰머리가 

더 많이 생긴

엄마를 안았다.




살가운 인사말은 더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다짐을 해봐도

엄마를 안으면

엄마만 안으면

나는 자동으로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기 때문이다.



엄마도 참으니까

나도 티내지 않아야 한다.





불편한 다리로 서서

손짓만 훠이훠이 내젓는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현관문을 천천히 닫았다.










엄마 퇴원이 며칠남지 않았을 때

수술하셨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께

편지를 썼다.



우리 모녀는 거기를 다녀가는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이겠지만



그곳에 입원한 우리 엄마는

나에겐 하나뿐인 엄마였고

내가 지금껏 비벼온 언덕이었고

바람을 막아준 태산이었다.




정형외과 과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3층 B병동 000 환자 보호자입니다.


소중한 엄마의 연골이 

닳아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한평생 일만 하신 엄마가 

이제 좀 쉬시나 했는데 

통증이 얼마나 심하셨는지 

스스로 수술을 받자고 병원에 오셨어요.



일찍 집을 떠나서 바쁘게 다니며 

회사일은 열심히 해도 

정작 엄마 곁은 못 지켰는데, 


이렇게 짧게나마 

엄마옆에서 효도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통증 없이 다닐 수 있도록 

새로운 시간들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프지 않은 다리로 

고향길을 다니실 엄마를 상상하니 

마음이 참 기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과장님.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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