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 이민자 Oct 29. 2021

‘칼의 노래’ 발췌

1장 ‘칼의 울음’ 중에서


<칼의 노래> 1장 ‘칼의 울음’ 중에서.

                                                                - 김훈


나는 적의 적의의 근거를 알 수 없었고 적 또한 내 적의의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이 있고 함대는 없다.


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 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 것을 정밀하게 짜맞추어 충과 의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형틀에 묶여서 나는 허깨비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내 몸을 으깨는 헛 것들의 매는 뼈가 깨어지듯이 아프고 깊었다.

나는 헛 것의 무내용함과 눈 앞에 절벽을 몰아세우는 매의 고통 사이에서 여러 번 실신했다.


나는 출옥 직후 남대문 밖 여염에서 머물렀다.

영의정 대사헌 판부사들이 나를 위문하는 종을 보내왔다.

내가 중죄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종들은 다만 얼굴만 보이고 돌아갔다.

이 세상에 위로란 본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장독으로 쑤시는 허리를 시골 아전들의 행랑방 구들에 지져가며 남쪽으로 내려와  달만에 순천에 당도했다.


 백의종군의 시작이었다.


———


순천 촬영은 있었으나 바다를 나가보지는 못했다.

바다를 지켜보다보면 성웅의 그릇을 닮을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옛 친구의 부친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