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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잃어버릴 것들에 대하여

늦은 학업을 일단락하며

by 행복한 이민자

졸업 시즌의 기분은 이상하다.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못할 것 같기도 하다.


학부 졸업 때의 심정이 그랬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교육의 시기를 끝내고 성인으로 사회에 나간다는 설렘. 그러나 그 사회가 날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 태산을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은 기개와 내 몸 하나 꼼짝 못할 것 같은 우울이 병존하는 시기였다.


학부를 다니면서 전공 공부가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마음 속에서 대학의 정의는 애매했다. 전공과 학문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과 열정은 맨 후 순위였다. 불가피한 통과의례이자 자유를 만끽하기 위한 배경으로 대학을 인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대학 인식은 의무 교육 과정에서 학생에게 가하는 사기에 가깝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전공 공부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든 거둬야 했다. 그러면서 취업이든 진학이든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나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졸업에 훌쩍 다가선 후에야 공부의 가능성과 재미를 살짝 깨달았다. 내 경우는 영어영문학과 정치외교학이었다. 범위를 크게 생각했을 때, 일종의 철학적 재미와 이를 표현하는 장르적 재미를 느낀 것이다. 나무만 보고 재미 없어 하다가 숲의 윤곽을 얼핏 본 느낌이랄까. 희곡 수업, 비평 수업, 영시 수업, 정치학 수업 들은 세상에 대한 암호를 푸는 과정의 은유 같았다.


그러다 졸업에 다가가니 그 흐름이 끊기는 게 아쉬웠다. 이제야 아주 조금 공부에 가까이 왔는데. 무의미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공부 자체가 의미있을 수 있다는 걸 간신히 안 것 같은데. 하지만 두 가지가 걸렸다. 내게 공부에 대한 꾸준하고 진지한 열정이 있는가. 그리고 그 공부가 내가 사회에서 자리잡을 수 있는 여지를 줄까. 자리 잡을 만큼의 열띤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방송국에 취업하면서 사회에 나왔다. 배워왔던 것들은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에 뭔가 빛나는 것을 흘낏 본 것 같은 느낌만이 남았다. 난 눈부신 빛을 잠깐 본 것 같아, 그런데 그 실체는 몰라, 이런 기분.


그렇게 20여년이 지나고 40대 중반이 되어 다시 석사 과정으로 돌아왔을 때 그 빛을 다시 만났다. 뭔지 모르겠는 그 빛. 어디서 본 것 같고 들은 것 같긴 한데, 실체를 모르겠는 그 빛.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문장에서 진리나 자유가 속해 있을 것 같은 그 빛. 문제는 알 것 같은 느낌만 있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학부 때는 나중에 언젠가는 알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젠 상황이 다르다. 지금도 모르면 아마 죽을 때까지 난 모를 것이다. 이렇게 밀도 있는 공부의 시간을 다시 갖기는 어려울 것이기에. 그래서 지금의 모호함은 더 애틋했다. 영원히 모를 빛에 대한 마지막 만남이니까.


그래도 시간은 그냥 쌓인 것은 아닌 모양인지, 문학도 영화도 연극도 철학도, ‘순리’처럼 이해되는 것들도 없지 않았다. 대충 이런 흐름이라는 거구나, 하는 느낌으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역시 공부의 세상은 넓고 깊어서 전문 저술가나 교육자가 아닌 이상, 이 앎의 체계를 제대로 장착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변두리에 머무는 것조차 힘들 겠구나, 학교를 떠나고 나면.


논문을 쓰느라 낑낑대고 나니, 안타까웠다. 지난 졸업 때 내가 잊어간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새롭게 마주할 졸업을 지나고 나면, 또 다시 나는 이 노력과 이 지식들을 빠른 속도로 잊어갈 것이다. 빛의 이면을 여전히 보지 못했는데, 빛 자체도 잊어가겠구나. 그리고 빛을 본 적이 있다는 복제된 기억만으로 살아가겠구나. 이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할까.


하지만 알고 있다. 이제 너무 느낀다. 인생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여전히 난 그 시간을 제대로 요리하며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에 경주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는 것을.


또 알고 있다. 내것이 아니었던 것들은 나를 빠르게 떠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학문의 언저리에서 근처에서 본 풍경들이 모두 내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지나가는 풍경은 지나가게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저 그것을 내 식대로 기억하고 추모하며 의미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존경하는 교수님이 보던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그만큼 자기 존재에 더 충실해 보였던 학우들의 눈이 바라보던 풍경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나의 풍경보다 얼마나 더 깊고, 멀리 있고, 섬세할까. 그리고 죽은 학자들이 쌓아올린 사유의 빛은 얼마나 정교하고 눈부실까. 그 모든 호기심을 스쳐 지나며 나는 또 다시 졸업을 한다. 이렇게 이별인가. 여전히 배우다 만 것 같은데, 아니 분명하게, 빛의 초입의 어딘가만을 거닐었는데 또 다시 돌아서는 걸까.


하지만 그냥 잃어버려 보기로 한다. 그리고 흩뿌린 빛의 조각들 속에서 나다운 산책을 해보기로 한다. 내 손에 쥐었다고 느낀들 그것이 어디 내 손 안에 머무는 것일까. 애초에 모두의 풍경은 다른 것을. 타인의 풍경을 경애하고 내 풍경을 소중히 하며 걸어보기로 한다. 삶과 작업에 충실하다면 그 빛과 그 풍경들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더라도, 그 조각이나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꿰매 나만의 퀼트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가르치는 일보다 배우는 일이 더 설렌다. 사람은 결국 설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배움의 설렘을 주어진 마지막 순간까지 가져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배움의 쓸모가 있다면, 그 설렘을 서로 공유하는 쓸모가 인간에겐 가장 중요한 쓸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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