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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ul 04. 2024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는 이야기꾼이다. 그는 시대의 단면을 잘 그려내는 재주가 있다. 그러나 그 묘사는 외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의 내면까지 파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동화되고, 그 인물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바로 우리 옆에 있는 누군가가 된다. 


그중에는 백석처럼 실존 인물을 그린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상의 인물들이다. 또한 역사의 비극 속에서 중심부보다는 조금 빗겨 난, 주변부에 있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기도 했다. 그들은 설사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 해도 주체적일 수 없었고, 시대 상황을 그저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를 그린 작품들도 그러했다. 이 책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도 그 예가 될 것이다. (또한 그의 다른 작품인 <원더 보이>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비단 그의 작품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이 더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문장의 치밀함 때문이며,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의식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작품 속에 잘 녹여낸다.


반면 그의 작품에 대해서 '뭘 말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의 장편과 단편, 산문을 꽤 읽은 편이지만, 그런 의견에도 일부 동감한다. 그의 작품들 속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기에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는 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누가 주인공일까. 처음엔 '나'와 정민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는 1인칭 화자가 주인공처럼 보이니까. 그러나 누가 주인공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화자를 주인공이라고 하자)


처음에 나는 그 사진이 남양南洋군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 처음에만 호기심을 보였을 뿐, 내 애인은 이내 그 사진에 흥미를 잃고 더 이상 누드사진을 보지 말라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나는 곧잘 두 눈의 초점을 흐릿하게 만들어 출신지를 알 수 없는, 그 환영 속의 나신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애인과 헤어져 독일에 가게 됐으며, 자신은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의 기이한 삶에 대해 듣게 됐다. 그는 호수로 떨어지는 붉은 별을 향해서 떠났다. 그 광경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이고 비행기가 이륙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 그러니 먼저 그 사진을 가지러 고향집으로 내려가던 그해 가을에 대해 말하려 한다. 모든 일들은 그 입체 누드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으니까.


소설의 도입부도 다소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작품을 다 읽은 후에는 그 도입부가 결말에서 이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은 왜 독일에 머물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며, 지나온 시간 동안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진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또 다른 인물들이 가진 이야기가 있다.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배경이 그 인물들을 규정하지는 못하지만, 그 인물에 대해 얼마간 이해를 할 수 있게 한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전두환 정권 시절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 더 이후에는 노태우 정권 시절)의 여러 모습들인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 작용에 주목하며, 그 결과물이 역사라고 말하는 듯하다.


폭력의 반대말은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한 바 있다. 권력이 훼손될 때, 그러니까 권력이 다른 곳으로 이양될 때, 폭력은 일어난다. 권력 유지에 안간힘을 쓰는 정권 아래에서 폭력이 빈번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런 정권은 대리 감시자들에게 그 불안한 권력을 나눠주는 것으로 권력 유지의 한 방편을 삼는다. 그 대리 감시자들의 불안한 권력은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이전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91년이다. 1987년의 민주화 운동으로 6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지만 사람들은 노태우 정권이 전두환 정권에서 이어지는 것이라 여겼다. 민주화 운동은 6공 들어서도 계속 이어졌으며, 특히 1991년 5월에는 '분신정국'이라고 할 정도로 분신 사건도 많았다. 정부는 학생 운동을 비롯해서 재야인사, 단체들의 활동을 탄압했기에 그에 대한 반발도 거셌던 것이다. 하지만 1991년 5월의 투쟁은 1987년과 달리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 


1991년 6월에는 전대협 대표로 대학생 두 명이 '8.15 청년 학생 통일 대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경유해 북한에 입국하였다. 이는 지속되던 공안정국을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기에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내용들을 텍스트로 만나는 것은 또 달랐다. 더욱이, 나도 대학생이 되었을 때 겪었던 학생운동과 관련된 경험들을 통해 (작품 내에서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지만) 그 당시를 떠올리며 읽을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즈음 내가 공들여지어 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 순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자각은 그해 6월, 나를 향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밀려들던 우울(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나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우울이 아니라 한 시대 전체가 느끼던 거대한 우울이었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그 우울은 너무나 컸다)로부터 나를 구해냈다. 나를 구한 건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예비 대표로 독일에 가게 되고, 독일에서 정교수, 헬무트 베르크, 강시우, 레이를 만나게 되고,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작가는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주인공의 독일행이라는 무리수를 둔 것인데 이는 급작스럽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는 필연적인 연결고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갈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해왕성을 발견해 냈다. 그는 손을 들어 물병자리 근처를 가리켰다. 뒤에서 연신 "거기, 들립니까?”라고 소리치던 레이는 제풀에 지쳤는지 이제 잠잠해졌다. 나는 뒤를 힐끔 돌아봤다. 어디로 갔는지 레이는 보이지 않았다. 

“서로 그렇게 영향을 끼치는 별들로 가득한 하늘치고는 꽤 과묵한 편이군요. 레이가 저렇게 간절하게 부르는데도 대답 한번 하지 않고.” 

"하지만 레이도 여기 있고, 학형도 여기 있지 않습니까. 과묵한 게 아니라 시끌벅적한 거죠. 제 발로 다들 몰려들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후 이야기는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닌>이라는 영화(?)를 매개로 전환된다. 사실상 이 책은 이 영화의 내용이 핵심이며, 그 내용을 말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로 감싼 것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주인공은 강시우(=이길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문장들에 줄을 그어가면서 학습함으로써, 그리하여 스스로 조직함으로써 198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이 19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살아남은 것이라는 허무와 우연의 세계에서 벗어나 백주대낮에 시민을 살해하는 폭압적인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존재, 서로 연대하였으므로 쉽게 죽지 않는 존재로 바뀌어나간 것처럼, 1986년 어두운 방에서 이 우주에 오직 자신 뿐이라는 외로움에 떨어대던 이길용에게는 제일 먼저 섭동이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이길용이 섭동에 대한 문장을 왼 것은 상희와 함께 경주에 다녀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바로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닌'에 나오는 그 방이었다. 




마치 숲에서 개개의 나무가 고유한 나이테를 가지듯, 개인마다 가진 역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환경을 겪은 나무가 유사한 나이테의 형태를 가지듯, 같은 시대를 살아간 개인들도 유사한 경험을 공유한다. 반면 인간은 고정된 개체가 아니며 사회 속에서 유동적이므로 개인차가 발생한다. 그러한 보편성과 차별성의 차이가 각 개인별로 역사와 사회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원인이자 결과다. 


개인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다. 이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한 말이었다. 이데올로그들이 말하는 '순수한 개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들과 관계들 내부에 있는 자신으로부터. 그렇다면 어디를 향해? 그 순간 내 몸으로 이해한바,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공간 속으로, 그리고 외로움이 없는 해방 속으로 그 공간은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아름다워 다른 곳에 그와 같은 세상이 하나 더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날의 그 몸이 바로 나라면, 그런 공간도 단 한 곳뿐이었고 그런 순간도 단 한 번 뿐이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각 개인이 그러한 방식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사실적이든 아니면 비현실적이든 상관은 없다. 어차피 작품을 통해 모든 이의 모든 방식을 그려낼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김연수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려고 애쓴 것이 느껴진다.


만약 작품이 더 길었더라면 따라가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인물과 이야기가 많아 혼란스러웠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작가도 이 정도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한 구태여 전체의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필요성은 떨어진다. 마치 클러스터를 이루듯 개개인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개인 간의 접점, 그리고 그 접점으로부터 발생하는 작용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이해는 가능할 듯하다. 

 

무거운 내용이고 익숙하지 않은 전개 방식이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지만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비단 내가 김연수 작가의 문체와 작품들을 좋아해서 만은 아니라 이는 한국 소설의 또 다른 시도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그 사진이 남양군도에서 왔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그 사진은 그 어느 곳에서도 올 수 있었다. 태국이나 오키나와, 어쩌면 캘리포니아의 재패니즈 캠프나 샌프란시스코, 심지어는 암스테르담이나 우리가 머물던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에서 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노트에다가 그런 얘기를 긁적였다. 하루는 그 노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팔라우에서 후지마루가 침몰하는 광경을 보게 되는 조선인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씌어졌다가, 또 하루는 소련군의 포로가 된 뒤 붉은 군대를 따라 독소전쟁에까지 투입돼 마침내 베를린에 도착하게 되는 조선인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씌어지는 식이었다. 
나는 멍하니 점점 더 붉어지고, 점점 더 커져가는 그 빛을 바라보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잘 가. 안녕, 나는 손을 들어 흔들면서 또 한 번 중얼거렸다. 안녕이라고,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1991년 10월 어느 날 해 질 무렵, 나는 한때 내가 살았던 어떤 뜨거운 시절에게 작별인사를 던진 것이라고. 그리고 그날의 그 붉은 기운은 강시우가 내게 건네준 한 장의 사진으로 영원히 남게 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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