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없어 보이는’ 미생물과 ‘뭔가 있어 보이는’ 플라톤이 원탁에 마주 앉아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플라톤이 쩔쩔맵니다. 온갖 논리를 구사합니다만, 듣도 보도 못한 미생물의 반응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합니다. 결국 고매한 플라톤은 자기 생각을 바꾸기까지 합니다. 매번 철학자를 미궁에 빠트리는 영리한 미생물과 묻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미련한 철학자, 이 둘의 토론 장면엔 뭔가 코믹한 반전이 있지 않나요? 이 책의 곳곳에는 이런 반전 포인트들이 반쯤 숨겨진 채 박혀 있습니다. 미리부터 어렵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보물찾기 하듯 즐겨보았으면 합니다.
제목부터 호기심을 끄는 책이다.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물론 이는 가상의 상황이지만, 자연을 대표하는 '미생물'과 인간을 대표하는 '플라톤'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을 위해 상징적으로 만들어 본 것이다. 또한 그 핵심에는 '생명'이 있다.
이제부터 우리가 이야기할 대상은 생명입니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진 것들, 즉 박테리아에서 인간까지 포괄하는 온갖 생명체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살아 있는 것만 죽을 수 있습니다. 돌은 죽을 수 없습니다.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은 살아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생명의 자기반성이 담겨 있습니다. 생명은 이야깃거리이자 동시에 이야기꾼입니다. 말하는 인간 자신이 생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명이 스스로를 되비춰보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꺼이 우리는 티 없는 거울이고자 합니다.
김동규, 김응빈 공동 저서인 이 책은 이렇듯 제목부터 독특하지만, 두 저자의 조합 또한 특이하다. 김동규는 서양철학, 특히 하이데거를 전공한 철학자이며, 김응빈은 미생물학을 전공한 생물학자다. 두 사람은 우연히 서로 알게 되어 연세대에서 수년간 진행한 통합 강의(<활과 리라>라는 과목으로 진행되었다)를 진행하였고, 이 강의를 바탕으로 책을 펴냈다. 참고로, 이 강의는 K-MOOC에서도 수강할 수 있다.
철학과 생물학은 언뜻 접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과학이 철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생물학 또한 철학과 이어질 것이라는 점도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생물학이 철학에 포섭될 것 같다는 느낌. 그래서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생물학 책보다는 철학 책에 더 가깝다.
예전에 내 브런치에서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는 모든 학문을 생물학의 관점에서 '통섭적'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는데, 이 책은 그와는 반대로 모든 학문을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 듯하다. 윌슨이 들으면 팔짝 뛸 것 같다.
책의 앞부분은 생물학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2/3 정도는 철학적인 고찰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내용이 생물학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결국 유한한 생명을 가진 생명체가 왜 '실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강의 제목이자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됐던 '활과 리라'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프롤로그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활弓을 가리키는 낱말이 두 개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톡소스toxos이고 다른 하나는 비오스bios입니다. 흥미롭게도 비오스라는 단어는 앞 음절에 강세가 있으면 ‘활’이란 뜻으로, 뒤 음절에 강세가 있으면 ‘생명’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동음이의어를 가지고 의미심장한 말놀이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활이 생명을 뜻하는 말이지만, 하는 일은 죽음이다.” 전쟁 중에 활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무기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과 일치하며, 한 생명체가 살려면 다른 생명체는 죽어야만 합니다. 생사는 야누스의 두 얼굴입니다. 옛 철학자는 언어유희를 통해 생명과 죽음이 실상 하나임을 알렸던 것입니다.
재미 삼아 우리도 이 말놀이에 참여하여, 독자 여러분이 지금 막 집어든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생명(활)을 노래하는 리라’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의 현악기인 리라lyra는 생명에 관한 책을 뜻하는 동시에, 생물학과 철학이라는 지적 체계를 가리킵니다. 생물학과 철학, 두 지성의 활대로 만들어진 리라에서 과연 어떤 노래가 연주될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제 천천히 책장을 넘기면서 생명에 관한 지적 하모니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bios'의 악센트에 따라 '활'이 되기도, '생명'이 되기도 하는데, 이는 '삶'과 '죽음', 즉 '생사'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에 저자는 '활'로 만든 악기인 '리라'가 그 생사를 모두 논할 수 있는 상징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고대 그리스어로 lyra는 '생명에 관한 책'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물학과 철학이라는 활대를 통해 나오는 이중주를 추구했는데 (이는 책의 부제이다), 과연 그에 부합했을까?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는 "미생물, 공생의 아이콘", 2부는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를 넘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먼저 김응빈은 미토콘드리아의 공생(세포 내 미토콘드리아가 사실은 까마득한 옛날 우리 세포 속으로 들어와 공생을 시작한 박테리아였다는 사실), 면역계의 자기-비자기 구별, 바이러스의 기생과 복제 등 구체적이고 생생한 생명 현상의 사례들을 제시한다. 우리가 하찮게 여겼던 미생물의 세계가 사실은 수십억 년의 역사를 통해 정교한 생존 전략과 공생의 지혜를 터득해 왔음을 보이며, 이는 생명체가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다양한 생명체들의 연합체이자 공생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였다. 특히 '모든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공생의 원리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이어 김동규는 이러한 생물학적 사실에 플라톤, 하이데거, 르네 지라르, 한나 아렌트 등 서양 철학자들의 사유를 엮어내며 논의를 확장한다. 미생물의 '모방'과 '복제'는 리처드 도킨스의 '밈(Meme)' 개념과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이론으로 연결되고, 바이러스의 작동 방식은 예술의 전염성과 숙주를 변화시키는 힘에 대한 은유가 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미시적인 생명 현상에서 거시적인 인간 문명과 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특히 그는 도킨스의 '밈' 개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도킨스의 밈 개념은 '현대적 버전의 모방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독창적이지 않으며, 도킨스가 강조하던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와 모순된다는 점도 비판의 이유였다. 무엇보다 모방이나 복제의 대상이나 주체가 되는 '자기'의 개념과 '자기동일성'의 관점에서 도킨스가 망각한 것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게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언급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직접적인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에필로그에서는 파인만의 유명한 일화를 언급하며, 인류가 멸종할 위기에 처했을 때 인류가 남겨야 할 가치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생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러 주제를 다루었지만, 이 책의 결론도 종국에는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바이러스와 미토콘드리아, 개체와 공동체, 면역과 공생 등 이 책의 소주제들은 사랑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왔던 셈입니다. 공생, 공동체성, 타자성의 위상을 드높이려 했던 것도 알고 보면 사랑의 존재를 알리려 했던 일련의 작업이었습니다. 예컨대 공생symbiosis이란 말에서 ‘함께sym-’를 가능케 한 것의 정체는 바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와서 밝히지만, 이 책에서 우리는 줄곧 생명을 사랑으로 고양시키는 한편, 사랑을 생명으로 육화시키고자 했습니다. 생명의 진화 과정이 곧 사랑의 역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공생'과 '사랑'이다. 경쟁이 아닌 공생이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자 더 나아가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는 미생물의 세계에서 발견한 가장 큰 가치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진화에서의 '적자생존' 논리도 비판하였는데, 기존의 '붉은 여왕 가설'이 군비 경쟁과 적대적 공진화를 설명한다면, 저자들은 상호 의존과 협력을 강조하는 '검은 여왕 가설'을 내세운다. 이를 통해 생명 세계의 본질이 무한 경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호혜적 관계, 즉 공생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미생물이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필요한 유전자를 버리는 전략 (그리고 필요한 부분은 다른 미생물로부터 공급받는) 역시 공생을 위한 전략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엄밀하게는 미생물과 고등생물은 구분 지어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미생물의 생존 전략이 인간에게까지 적용되는 대안적 사유가 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가치 측면에서, 또는 상징성 측면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여기에서의 공생은 인간 종 내, 즉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인간들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종 간, 즉 인간과 모든 생명체,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공생, 공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생의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생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유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만든, 생명과 문명에 대한 태피스트리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철학을 더 강조함으로써 윌슨의 <통섭>과는 반대의 입장에서 이를 해석하고 구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과 사랑, 죽음과 같은 인간 고유의 영역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점은 <통섭>의 내용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이 정신적인 영역(생물학적 관점에서의 중추신경계)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았다. 가령, 예술을 강한 전염성을 지닌 '바이러스'에 비유하며, 플라톤이 예술을 경계했던 이유를 다르게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타자의 죽음을 애도할 줄 아는 능력을 인간성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았고,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호모 멜랑콜리쿠스(Homo Melancholicus)'로 정의하였다. 멜랑콜리, 즉 슬픔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며, 그 기저에는 사랑이 있다. 이는 인간의 실존 문제를 또 다른 관점에서 본 것이라 하겠다.
반면, 이 책에서 플라톤으로 대변되었던 인간의 이성적, 위계적 사고방식은 예측 불가능하고 유연한 미생물의 세계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오히려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존재인 미생물에게서 생존의 지혜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
대화 형식의 서술과 적절한 비유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개념들을 쉽게 풀어내어 일반 독자들도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지만 전문적인 생물학 지식과 철학적 개념들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 둘이 결합하여 낳은 통찰들 역시 다 따라가기는 버겁지만 지적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책이 향해 가는 점, 결론은 다소 맥 빠지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실존문제에 대한 답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공생과 사랑이라니. 하지만 이는 이 책이 주는 유일한 답도 아니거니와 정답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는 인간과 자연과 생명체를 보는 시각을 더 확장시킨다. 미생물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지만 그들의 세계는 가장 크다. 이 지구상에서, 그리고 우리 몸속까지 미생물이 없는 곳은 없으니까. 모든 곳에 적응한 미생물은 그래서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위대한 존재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출발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