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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쫄깃한 리뷰 Jan 07. 2022

뒷북 리뷰: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

홀로서기를 위한 몸부림의 영화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영화 아입니까?”

출처: 다음 영화 <리틀 포레스트: 사계>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6597


그렇다. <리틀 포레스트>는 이미 한국에서 임순례 감독이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김태리’를 주연으로 ‘류준열’ 등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청춘 배우들을 등용해 청년들의 힘든 도시 생활의 삶을 힐링해주고 있다고…….(차후 이야기하겠지만, 내가 시사회에서 본 일본 영화는 단순한 힐링 영화는 아닌 것 같았다.)


리틀 포레스트 영화는 위에도 언급했듯이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 후 일본에서 영화화되었는데 각 계절을 60분가량으로 표현해, 상영관에서는 ‘여름과 가을’, ‘봄과 겨울’로 묶어 각 2시간씩 상영했다. 각각 2014년과 2015년의 개봉한 일본 영화들은 내가 기억하기론 한국에서도 잔잔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계속해서 음식들이 등장해 관객들이 스스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부여잡는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어찌 되었건 배를 채우고 가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 안 그러면 영화를 보다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일본 가정집에서 메뉴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 리뷰하고 있는 영화 말고 케이블 TV에서 ‘여름과 가을’ 편을 봤다. 그때 한 10분 정도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빠가 ‘이런 걸 무슨 재미로 보냐’면서 리모컨을 잡아 채널을 돌린 기억이 난다.


"영화판 삼 시 세끼 아잉교?"


그 신선한 충격은 나영석 PD의 <삼시 세 끼>를 처음 본 충격과 이어진다. 나영석 PD가 한국 예능과 방송계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지만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자연스러움과 리얼리티와 예능 사이의 경계를 거의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즉 예능을 통해 현대인들이 잊고 있던,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었던 심적 평화, 유유자적한 삶 등은 현대인들에게 간접적인 스트레스 해소 경험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삼시 세 끼>의 문제점은 여기서 드러난다. 연예인들의 유유자적한 일상생활과 따스함을 겪은 뒤 다시 돌아온 현실세계는 아직 회색 빛의 거친 사회인 것이다. 여전히 나는 일터에 나가 근무를 해야 하고, 고통받는 출퇴근 길이 끝나지 않는 삶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집중하고 살아가고 있는 삶은 내가 사랑하고 닮아가는 예능의 삶을 따라갈 수 없다.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결국 나영석 예능은 그 순간의 만족감만을 준다.  


다시 <리틀 포레스트>로 돌아와 보자. 내용은 별 것 없다.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은 사실 14년과 15년에 각각 두 시간(총 4시간)의 영화를 편집을 거쳐 2시간으로 만든 영화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면 예쁘고 아름답지만, 어느 각도에서 보면 중성적 매력과 더불어 예쁜 얼굴인가? 의 의문이 드는 배우 ‘하시모토 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와서 농사짓고 밥 짓는다. 주인공 ‘이치코’ ‘코모리’라는 일본 농촌 출신의 여자다. 고등학교까지 ‘코모리’에 있는 집에서 통학을 하다 성인이 된 후 ‘코모리’를 떠나 도시 생활을 이어가다 맘에 울적함과 실패를 느껴 고향인 ‘코모리’로 도망쳐 온다. 그리고 농촌을 지키고 있던 친구, 어르신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농사와 더불어 여러 가지 일본 농촌에서의 삶을 보여주며, 아름다운 일본 농촌의 풍경을 보여준다. 한국의 농촌과 비슷하면서 다른, 보다 정갈하고, 인공적인 구조물마저도 자연물같이 보이는 조화를 보여준다. 또한 주인공의 하루하루 먹는 음식과 그 음식 만드는 과정을 잔잔하고도 담백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를 딱 여기까지 생각하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맛있어 보이는 음식, 그리고 고뇌와 갈등이 그렇게 크게 드러나지 않는 삶. 평화와 잔잔함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깊은 담백함의 맛으로 보면 이 영화는 힐링 영화로 끝날 수 있다.


"삼 시 세끼랑은 좀 다른디요"


하지만 영화는 보일 듯, 안 보일 듯 사회적 메시지를 품고 있다. 우선 캐릭터의 설정을 살펴보자. 주인공 ‘이치코’는 도시 생활을 하다 실패를 하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왔다. 고향 친구인 ‘유타’ 역시 학창 시절 고향을 떠나고 싶어 부단히 공부를 해 도시로 갔지만, 도시인들의 말 뿐인 행동과 사고방식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두 인물 모두 도시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차이점이 있다. 도망 온 것과 돌아온 것의 차이.


이치코는 도시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극 중 친구인 ‘키코’ 에게도 시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친해지고 싶은 남자를 위해 도시락을 싸왔지만, 남자가 그의 친구들에게 하는 말 ‘손으로 짜 온 머플러는 부담스럽다. 손으로 만들 시간에 돈을 벌어 선물을 사야 된다’ 따위의 말을 듣고는 스스로 맘의 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한다.


“한 걸음을 못 떼는 바람에…….” 이어 ‘분교에서 온 산 원숭이’라고 놀림받던 자신의 고교생활을 떠올린다. 아마 그때부터 세상과 삶을 당당히 마주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근데 저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남자에게 정성을 보여주는 것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장면을 통해 이치코가 도시의 생활을 제대로 견디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도망쳐 온 이치코는 결국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도망쳐 온 도피처는 일시적이다. 궁극적이 될 수 없다. 결국 도망쳐 온 곳으로 돌아가 모든 상황을 정리해야만 한다. 도피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치코는 강인한 여성이다. 이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유추할 수 있다. 처음 도시 생활 때 한 남자와 같이 동거한 그녀는 어느 날 수유나무 열매를 보게 된다. 수유 열매를 따고 싶었던 이치코는 점프를 해보며 시도해보지만, 그녀의 키에 비해 수유나무 열매는 너무 높이 달려 있었다. 그 노력을 비웃듯이 남자는 간단한 점프로 수유 열매를 따며 이치코에게 건넨다. 하지만 이치코는 그 열매를 거부하고 자신의 노력을 따기 위해 다시 점프를 시도한다. 그녀는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도시 남자보다 체력이 좋고, 지기 싫어하며 주도적이며 능동적이다. 그녀가 살아왔던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남성들과 일을 하는 장면들을 보며 난 성별의 차이(difference)를 느끼지 못했다. 남자들과 이치코, 두 사람이 능동적으로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감명받았다. 그녀는 성별을 인지하지 않는 하나의 주체로서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현재의 삶을 마주할 것”


 ‘삼시 세 끼’에서는 농촌 생활의 고됨보다는 일상생활의 유유자적함이 보다 강조된다. 아침에는 뭘 먹어야 하지? 점심은 무엇을 먹어야 하지? 의 갈등이 그 프로그램의 주된 고민이고 갈등이다. 그 이상의 깊은 갈등은 없다.


리틀 포레스트 역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치코의 걱정과 마음의 갈등은 ‘무엇을 먹어야지’가 아니다. 사실 그녀가 만든 음식들은 모두 그녀의 어머니가 예전에 해주었던 음식들. 그리고 그 계절 상황에 따라먹을 수밖에 없는 음식들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음식을 갖고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만들까? 정도다. 그녀의 주된 고민은 영화에서 표면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로 어떻게 하면 도망친 도시에서의 삶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까?이다. 결국 그녀는 겨울, 행복했던 고향의 삶을 떠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이 떠남은 도시에서의 도망침과는 다름 떠남이다. 자신의 삶을보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한 한 여자의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 발걸음을 떼지 못해 세상을 마주하지 못하고도 망친 이치코는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 다시 떠난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 이치코는 5년 전 자신의 곁을 말도 없이 떠나버린 엄마한테 한 통의 편지를 다시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원’이니 ‘나선’이니 하는 글을 이해하지 못한 이치코는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원은 끝이 없이 돌아간다. 우리는 어느 순간 부단히 움직여봐도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노력해도 소용없는 듯한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치코가 그러했다. 코모리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갔지만 결국 도망치듯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인간은 ‘원’이 아니라 ‘나선’이다.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는 나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아가며 조금씩 커지는 나선의 삶. 실패한 것 같아 보이지만 아닌 나만의 영역을 넓혀가는 하는 행위였다.


이외에도 이 영화의 메시지는 더 있었다. 하지만 더 길어지는 글들을 붙잡고 싶지는 않아 여기서 마치고자 한다.


영화는 '일본문화원'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진행한 이벤트의 시사회가 당첨되어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보게 되었다.

서울 아트시네마는 서울극장 안에 독립된 상영관으로 주로 60년대 70년대의 옛날 영화 및 재 개봉하는 화제의 영화를 재상영한다. 영화관의 분위기가 좋아, 일반 멀티플렉스에 지친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로 굉장히 좋을 것 같다.

좋은 영화를 시사회로 보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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