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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향기 Nov 21. 2024

달마시안

외로움에 대하여

“제가요. 오늘 시험을 망쳤어요. 벌써 4번째였는데. 하하.”

남자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

여자는 말이 없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여자가 말이 없자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혹시 101마리 달마시안 보셨어요? 어렸을 때 진짜 많이 봤는데. 유치원에서 한번 봤는데, 그 뒤로 선생님께 조르고 졸라서 반복해서 봤거든요. 지금 본인하고 되게 비슷해요.”

남자는 여자의 얼룩진 교복을 보고 말을 이어갔다.

“근데 저는 처음이랑 끝만 주구장창 돌려봤어요. 달마시안 가족이 만나서 행복해하는 부분 들 만이요. 처음에 행복하고, 끝에도 행복하고. 중간에 나쁜 악당들이 나오는 건 보기 힘들더라구요.”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입김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기승전결로 따지면 감정이 고조되는 ‘전’은 보기 힘들었다고 해야 되나? 생각해 보면 그 귀여운 점박이 강아지들이 악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나둘씩 짐차에 올라타는 장면 같은.. 그런 떨리는 순간에 잠시 호흡을 멈추고 주인공에 바라보면서 조마조마 해야 하는 것이 정말 싫었던 것 같아요.”

여자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리 위에는 겨울 바람이 매몰차게 불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느냐! 바로바로..! '빨리 감기'였습니다. 어서 그 힘든 고통의 시간들을 지나고 기어코 자신의 자리에 돌아왔다는 것에 행복해하며 서로를 껴안고 춤추고 입맞추기를, 그리곤 아름다운 장면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x2, x4 버튼을 누른거죠.”

남자는 서서히 여자에게 다가갔다.

“근데 현실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스킵’도 ‘빨리 감기’도 없는 것 같거든요. 홀로 그 시간을 온전히 버텨내야 한다구요.”

여자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그렇게 해도 스킵이 되지 않는다구요!”

남자는 난간 위에 선 여자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



하루에 두 번 오르내리는 길이었지만 언제나 그 길은 남자 혼자였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가로등 중 두 번째 가로등을 지나면 쓰러져가는 빨간 간판의 순대국밥집이 나왔다. 가로등이 미처 닿지 않는 갈림길이 몇 군데로 나있었는데 남자는 그중 가장 어두운 가운데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일같이 오고 가는 길이었지만 익숙해질 줄 몰랐다. 연달아 꺼져있는 가로등 두어 개를 지나면 조그만 슈퍼 앞의 가로등 빛이 남자를 반겨주었다. 매번 졸고 있는 주인의 모습과는 달리 항상 물건이 잘 진열되어 있는 슈퍼를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허름한 고시원이 나왔다. 남자는 파란색 바탕에 궁서체로 '일신 고시원'이라고 적혀있는 간판을 지나 엘리베이터도 없는 예의 그 낡은 건물을 한 층 한 층 올라갔다. 혹여나 한 소리 들을까 싶어 조심스레 신발을 벗어 놓고는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 발만 겨우 뻗을 수 있는 그 공간에 힘겹게 누운 남자는 그제서야 외로움을 작게 입으로 내뱉었다. 그렇게 뱉은 것들이 고시원 복도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일신(日新): 날마다 새로워짐'이라는 그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것은 비단 물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일상을 지겹도록 반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매일 새로워지길 지루하게 목발질하고 있었다. 남자는 매번 다른 방에서 복도를 통해 들려오는 작은 한숨들을 목도했다. 날마다 새로운 한숨이었다. 남자는 사방으로 둘러 쌓인 담 너머로 들려오는 간헐적인 짧은 숨들을 뒤로하고 자신을 바라봤던 난간 위 여자의 눈빛을 되새김질했다. 악당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Comment


자신을 파괴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을까. 있겠지. 알지.

근데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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