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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향기 Oct 30. 2024

수습 과장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아저씨 내 말 듣고 있어요?


몽롱하게 귓가를 울리던 클래식 음악이 뚝 끊기며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까 낮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음악이었던 것 같은데. 베토벤이라고 했던가.

"아니 내 말 듣고 있냐구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남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여자의 오른쪽 가슴팍에 적힌 ‘로얄 클래스’라는 글씨가 오늘따라 유난히 빛났다.

"아 예예.. 듣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빗자루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여자의 눈을 피해 대답했다.

"이따가 어제 말씀드린 그분이 면접 보러 오실 거예요. 면접 끝나면 인수인계 잘해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


'61세, 여, 편의점 경력 8년, 전단지 5년, 식당 보조 6년...'


남자는 지원서를 읽다 말고 경비실 한쪽에 던져두었다. 내일모레 일흔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노인의 시간은 도둑같이 다가오고, 연기처럼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가도 별안간 갑자기 들이닥쳐, 근 몇 년간 당연했던 것들을 모조리 압수해 버리는 것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죽기 살기로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여 정년퇴직까지 한 그였다. 퇴직 이후 그의 시간은 사회의 그것과 같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도 그의 시간을, 그의 생활을 궁금해하지도, 알려하지도 않았다. 한 때 멋진 외제차를 살지 적당한 국산차를 살지 고민하던 젊은 시절의 그는 온데간데 사라진 지 오래였다. 편의점에서도, 판촉 행사에서도, 하다못해 공사판에서도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런 그에게 로얄 클래스 아파트 경비원은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 열심히 살아온 그의 경력을 인정하는 듯한 부녀회장은 그를 눈여겨보는 것 같았다. 지난주에 벌어진 음식물 쓰레기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아니 아저씨 저한테 진짜 혼나고 싶어요? 지금 이게 주차가 제대로 된 거라고 생각해?"

아무래도 좋았다. 무슨 말을 듣건 사람이 있는 그곳이 좋았고 그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자신의 쓸모를 인정해 주는 이곳의 주민들이 좋았다.

"제대로 다시 해놓겠습니다.. 해놓고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아 됐어요 전화는 무슨. 바쁜 사람 오라가 라야. 다음부터 똑바로 하세요."

'로얄 클래스' 답게 이곳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명품으로 치장하고 외제차를 끌고 있었다. 물론 몸에 두른 명품에 달린 0의 개수가 그에게 말을 건네는 횟수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곳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남들과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굴었다. 물론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아저씨. 여기 로얄 클래스예요. 항상 명심하세요."


그런 그에게, 이제야 막 사명감을 갖고 '로얄 클래스'의 일원이 된 그에게, 멀리서 보아도 꽤나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


"... 고개 돌리지 말고 그 상태에서 들어주십시오.."

여자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나왔다. 테이프가 단호하게 신음을 단속하고 있었다.

"..."

"여기서 나가서 그대로 이 일을 잊고 지내는 겁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신고해도 어차피 똑같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똑같은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다른 일을 찾아보실 수 있잖아요.. 어쨌든 기억 속에서 '로얄 클래스'라는 단어는 지우시는 겁니다.. 상상하지도 마세요.. 알아들었으셨으면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

여자는 묶인 손과 함께 자신이 어둠 속에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 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극심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주셨으면 합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여자는 빠르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것일까.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다른 생각은 안 하셨으면 합니다.. 그냥 고개만 끄덕이시면 나가실 수 있습니다.. '로얄 클래스'라는 단어 근처에는 앞으로 얼씬도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아시겠나요..”

여자는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자신의 오른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렸다. 몸이 점차 떨리기 시작했지만 이내 자신이 가져다 줄 희소식을 기다리는 가족을 떠올렸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이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소개해준 아주머니 아시죠.. 그 아주머니한테 아니 우리 부녀회장님한테 가서 '나와 안 맞는 것 같다', '몸이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이렇게 몇 마디 해주면 됩니다.. 그게 어렵진 않잖아요.. 지금 고개 끄덕이시고.. 포기 각서에 도장 찍으시고.. 그냥 나가시면 됩니다.."

여자는 피죽도 못 얻어먹은듯한 남자를 떠올리며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겨우 벽에 기댄 채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옆에는 새것 같은 골프채가 세워져 있었다.

"왜 말을 안 들으시는 겁니까.. 그냥 여기서 나가서 식당일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면 화장실 청소부도 하실 수 있잖아요.. 저도 좋고.. 아줌마도 좋고.. 얼마나 좋습니까.. 대체 왜 자꾸 제가.. 나서게 하시는 겁니까.. 왜 하나.같이. 제 말을 듣지 않죠.. 저도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봤자 이제 4개월입니다.. 4개월.. 으음.. 그래도 안 되겠습니까.."

남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듯 골프채로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걸어오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제야 울부짖기 시작했다. 테이프에 막힌 울음이 온몸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저는 이제 막 적응을 하는 단계입니다..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해요.. 남들보다 조금 늦는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하게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직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제가 실수했어요.. 로얄 클래스인데..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남자는 혼잣말을 하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저한테는 좀 더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로얄 클래스에 이제 좀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줌마는 고작 알바만 몇 개 하신 거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줌마는 로얄 클래스를 이어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이 분들을 모실 자격이 없어요..”

남자는 손때 묻은 라디오 켰다. 입주민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임시 휴게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텅 빈 지하주차장 맨 밑층을 한쪽 모퉁이부터 천천히 채워나가고 있었다.



Comment

노인의 시간은 막연히 두렵다.

감히 가늠할 수도, 상상하기도 어렵다.

너라고 다르겠어. 나라고 다를까. 우리는 같은 사람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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