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시작.
"여기서도 500자 이내로 말해야 되는 건 아니죠?"
웃으며 말하는 남자의 손에서 멋진 시계가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저희 집은 존나 가난했어요. 왜 요새 말하는 흙수저 있잖아요. 아 어차피 녹음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편안하게 말할게요. 요새는 이런 단어만 써도 뭐라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괜찮죠? 조금만 편하게 할게요."
백 명이 채 안 되는 관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저희 집은 가난했어요. 그래서 스무 살이 되자마자 매일 알바를 해야 됐거든. 그때부터 알바를 했어요 내가. 군대를 갔다 온 뒤에는 노가다를 잠깐 했었는데, 노가다를 하면요. 공구리라고 하는 게 있어요. 여기 있는 분들은 노가다를 해보셨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뭐 콘크리트를 그렇게 부르는 거더라고요. 노가다 첫날 그 단어를 들었습니다."
앞 줄에 앉아 노트에 열심히 무언가를 적는 청년은 들어봤다는 눈치였다.
"여러분들 전공이 다양한 것처럼 노가다판에도 각자 다른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뭐 누구는 에어컨 실외기 작업을 하고 누구는 공구리를 치고 누구는 철조망을 치고 뭐 그런 식이에요. 근데 제가 노가다를 들어간 게 아는 사람 통해서 들어간 게 아니라 그냥 인터넷에서 보고 들어간 거란 말이죠? 근데 참 운이 좋게 좋은 분을 만났어요. 그러고 보면 내가 참 운이 좋아요. 아 물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운이 좋아서라는 건 아닙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제 아버지뻘 되는 그 상사분은 참 좋았어요. 아니 심지어 내 또래 아들이 있는 분이었다니까. 어쨌든 그 분하고 같이 일을 하게 됐는데 제가 하는 작업은 에어컨관을 끼우는 일이었어요. 에어컨관이요. 잘 느낌이 안 오시죠? 그냥 쉽게 말해서 새로 짓는 아파트에 기다란 에어컨 관을 연결하는 일입니다. 아직도 그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네. 그때가 제가 대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요. 복학하고 한 학기 다니자마자 패기롭게 시작한 여름 알바였거든."
남자는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이어서 말했다.
"어쨌든 그 일을 하는데 그때 제가 했던 생각이 참..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요. 뭔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아 이런 알바를 하면 다음에 '대외활동이나 동아리 경력 쓸 때 쓸 수 있을까' 였어요. 그냥 열심히 일하고 돈이나 벌면 될 텐데 그걸 어떻게 잘 써서 '나는 이런 고생까지도 해봤다'라는 걸 적고 싶었다니까요. 진짜 그때 얼마나 고민했는지 아직까지도 그 고민을 했던 시간이 생생하다니까. 어깨에 그 기다란 에어컨 관을 세네 개 얹고 가면서 '아 이걸 나중에 어떻게 면접관 앞에서 잘 말하지'를 고민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몰라. 아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일 수도 있죠."
남자가 손에서 포인터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다행인 게 뭔지 알아요? 그 해 겨울 내가 인도를 갔다 왔단 말이야"
스크린에 남자가 인도에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인도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듯한 사진이 나왔다. 사진 속 환하게 웃는 인도 아이들 옆 남자의 옷에 유명 대기업의 로고가 박혀있었다.
"네.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그 유명한 대외활동 사진입니다. 뭐 무료로 갔다 온 거죠. 비행기값이며 숙식비 전액무료. 대기업에서 후원하는 그 활동 있잖아요. 몇 명 안 뽑는 그거. 이 활동을 하고 실제로 그 기업에 입사했습니다. 아니 기업 입장에서는 좋잖아. 안 뽑아줄 수가 없지. 자신들이 후원하는 활동을 했다는데."
'오오’ 하는 소리가 중간중간 흘러나왔다.
"내가 아까 했던 그 고민들이 저기 저거 면접 볼 때 쓰였다니까. 자소서는 물론이고 면접에서 자기소개할 때도 마무리 멘트로 써먹었다니까. 아 어쨌든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지. 아 공구리."
남자는 강당 밑에 있는 보조 스태프에게 물을 더 갖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왜 공구리 얘기를 했느냐. 자 봐봐요"
스크린에 기다란 관 사진과 한 문장이 나왔다.
'저는 청테이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자 여기서 뒤에 문장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되는 분 있나요? 면접관이 됐다고 생각해 보세요. 10초 드리겠습니다."
강사는 스태프가 가져온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팔짱을 낀 채 뒤로 돌아 스크린을 봤다.
"보통 이렇게 쓰면 뭐 강도라든지 뭐 접착제 역할이라든지 이런 걸 생각한단 말이죠. 근데 전 제가 노가다를 했었으니까. 그 경험을 가져다 쓴 거예요. 이걸 그날 엄청 고민하다가 썼단 말이야."
스크린에 긴 글자들이 나왔다.
‘건설 현장에서 본 청테이프 - 저는 제 스스로를 ’ 청테이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 뜨거운 여름, 건설현장에서 한 달 반 정도 일을 했습니다. 에어컨 배관을 설치하는 일이었는데, 배관의 입구를 매번 청테이프로 뜯어서 막곤 했습니다. 작업 중 의문이 들어 왜 그렇게 번거롭게 청테이프를 일일이 붙여 입구를 막는지 여쭤보았습니다. ’ 작은 부분이지만 이 청테이프가 없으면 시멘트가 샜을 때 어디에서 새는지 모르기 때문에 전체적인 작업을 위해 반드시 붙여주어야 한다’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인 작업을 위해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청페이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걸 자소서에도 그렇고 면접에서도 마무리 멘트로 썼거든. 이게 진짜 먹혔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여러분에게 버릴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실제로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적당한 단어를, 표현을 못 찾았다는 거지. 아니 노가다판에서도 멘트를 찾아서 자기소개서에 썼다고. 근데 여러분은 지금 뭐야, 관련 전공과목도 다 들었고 점수도 괜찮을 거 아니냐고. 팀플도 많이 해봤잖아. 아니 대학생 중에 팀플 안 한 사람이 어딨냐고 다 해봤잖아."
말을 멈추고 남자는 관객들을 응시했다.
"할 수 있다고. 우리가 할 수 있게 만들어줄 거라고. 더 이상 자소서 쓰기 힘들다, 혼자 취준 하기 힘들다 뭐 이런 얘기 안 나오게 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믿고 한번 따라와 봐요. 여러분의 금 간 취준길 우리가 청테이프처럼 잘 붙여드릴게. 밑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남자는 무대에서 내려온 뒤 앞에 준비된 간이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그럼 지금부터 상담받으실 분들은 한 분 한 분 와서 적어오신 서류를 가지고 앉으시면 되겠습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스태프가 말했다.
관객들은 스태프의 진행 하에 '컨설팅 중'이라는 글씨가 붙은 책상 앞으로 한 명 한 명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급한 얼굴을 한 몇몇의 학생들은 곧 수업이라며 '취업 컨설턴트'라고 적힌 명함을 받아갔다.
Comment
쓸 때와 읽을 때 느낌이 다른 글을 좋아한다.
이 글이 그랬다.
난 청테이프일까. 생각해보면 늘상 컨설팅이던 뭐던 있었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