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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Jan 05. 2021

연과 설날

드론이 나는 시대에 북한 남자의 연 추억

 연과 설날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연 띄우는 꿈을 꾸곤 한다. 꿈속 내 자아에는 천진난만한 10대의 ‘나’와 탈북을 꿈꾸던 20대 시절의 ‘나’, 그리고 남한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30대 ‘나’가 모두 투영되어 있다. 설날을 기다리는 10대의 ‘나’는 여전히 연살로 쓸 수숫대와 든든한 연실을 장만하기에 바쁜 개구쟁이이다. 20대의 ‘나’는 연을 날리면서도 탈북을 생각한다. 뿌연 기억의 안갯속에서 나는 분명 탈북에 성공했는데 왜 아직도(혹은 다시) 이곳에 있는 것일까. 내가 연이라면 쉽게 탈북할 수 있을 텐데 하고 걱정한다. 30대의 나는 어른답게 주로 위로하는 역할을 맡는다. 나는 서로 다른 시간에 있는 나의 두 자아에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이건 꿈이어서 괜찮아. 너희는 꿈을 이루었고, 무엇보다 이젠 안전해.” 하지만 그러는 30대의 나조차 혹시 이게 꿈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종종 시달린다. 나의 세 자아는 꿈속에서 각자의 감성과 역할에 충실하면서 서로에게 중첩되고 간섭한다. 예를 들면, 10대의 내가 남쪽으로 날려 보냈던 연을 찾아 30대의 내가 경기도의 어느 산발을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20대의 내가 10대의 나에게 연을 만들 수 있는 큰 창호지를 마련해 주기도 하는 식이다. 연은 꿈속에서 분열된 나의 세 자아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다.


 꿈을 깬 후에 내게 남는 것이 꼭 서글픔 뿐만은 아니다. 아련한 옛 시절의 추억 또한 내 이부자리에 머문다. 반쯤 잠에 취해 그 시절의 추억에 잠겨 있노라면, 내 입 꼬리는 어느새 슬그머니 치켜 올라간다. 이제 그 시절 설날의 추억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해 보려고 한다. 


 먼저 내 추억 속의 설날은 신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내가 태어나던 당시 북한에서 음력설은 생소한 명절이었다. 오랜 세월 전통 명절이었던 음력설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말미암아 1910년 이후 점차 사라져 갔다. 해방 후에도 음력설은 북한 정부의 ‘봉건잔재 타파’의 서슬 밑에서 부활하지 못했다. 이후 1980년대 ‘조선민족제일주의’의 구호 아래 민족문화 전통을 고수하고 발전시키려는 시도에 의해 음력설과 추석을 비롯한 민속명절들이 재등장했다. 하지만 80년 가까이 양력설에 익숙하던 주민들은 생소한 구정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2003년 북한 정부는 신정을 구정으로 대체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고, 양력설에 진행되던 국가적 행사들을 음력설에 맞춰 재편성했다. 민간 차원에서는 제사도 구정에 맞춰 지내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전에 3일 동안 휴식하던 양력설을 하루만 쉬게 하고 음력설을 3일 간 쉬도록 했다. 구정 명칭도 설 명절로 부르도록 했다.


 나는 바뀌어 버린 설날이 혼란스러웠다. 15살 소년에게 당시의 이러한 조치는 93년 전 일제의 만행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폭력이었다. 우리 가족은 양력설을 고수하기로 합의했다. 적어도 제사는 꼭 양력설에 지내야 한다고 했다. 조상님들이 제삿날 바뀐 줄 모르고 제사상 받으러 왔다가 그냥 돌아가게 되면 그런 불효가 또 어데 있겠냐는 것이 아버지의 논리였다. 천당에는 노동당이 없을 테니. 장손이었던 내게 조상님들 제사는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도 양력설만 인정할 것이라고. 


 어릴 적 나의 설 준비는 유난히 일찍 시작되었다. 마을 밖 수수밭에 탐스런 수수 이삭이 익어가고 주인아저씨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를 때면 설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우선 아저씨에게 큰 연을 만드는데 필요한 긴 수숫대를 부탁해야 한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는 추수가 끝나면 제일 길고 튼튼한 수숫대를 이삭 바로 밑까지 바싹 잘라서 한 묶음씩 가져다주곤 했다. 어느 해인가는 아저씨 밭에 수수 대신 옥수수를 심게 되었다. 아저씨는 많이 미안해하며 가을에 꼭 좋은 수숫대를 구해준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셨다. 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한 큼직한 종이도 필요하다. 그 시절에 내가 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종이는 연력이었다. 해마다 새해가 오면 인민반을 통해 국가에서 세대별로 연력 1장씩 공급했는데, 대략 너비가 50, 길이가 70 센티미터 정도로 연을 만들기에 제격이었다. 앞장에는 해당 연도의 연력과 체제 선전 사진이나 그림이 있었지만 뒷장은 백지였다. 설날까지 열흘쯤 남은 시점이면 부모님께 연력을 써도 되냐고 조르는 게 일이었다. 마침내 부모님이 허락하시면 연 만들기가 시작된다. 종이 중심부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을 내고 잘 말린 수숫대를 쪼개서 만든 연살을 붙이고 연의 네모 서리에 조, 국, 통, 일이라고 큼직하게 써넣는다. 해당 연도도 구멍 바로 아래에 새긴다. 이 모든 작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쓸 수 있는 종이가 단 한 장밖에 없기 때문에 망치면 한해를 망치는 거다. 다 쓴 공책 서너 장을 고르게 잘라 이어 붙이면 연 꼬리까지 완성이다. 애용하던 낚싯줄을 풀어 얼레에 감고 연과 연결하면 준비는 끝이다. 아직까지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시험비행이 남아있다. 시험비행은 보통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다. 연의 균형과 안정감 정도만 확인을 하고는 바로 끝낸다. 동생이 좀 더 날리자고 아무리 떼를 써도 어림없다. 설날을 위해 참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까치설날은 즐거운 고역이다. 설음식을 만드는 어머니를 도와 잔심부름을 해야 하고, 설날에 입을 옷들도 미리 손질해 둬야 한다. 한 해 동안 윷놀이 판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일과 새로운 윷을 준비하는 것도 내 몫이다. 하지만 제일 어려운 것은 자정까지 잠을 참는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초저녁 잠이 많았다. 전기라도 있으면 그나마 좀 괜찮았지만, LED도 없던 시절에 기나긴 겨울밤에 자정을 기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곤혹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눈썹이 하얘지기는 싫었다. 어른들은 설날을 맞이하기 전에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했다. 나중에야 어른들이 떡가루를 발라놓는 줄 알았지만, 동네 형들까지 친구 사례를 들어가며 겁을 줬다. 어머니는 설 전날이면 항상 밤을 새우셨다. 아버지가 장남이셔서 우리 집 설 준비에서 제사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제사음식을 만드는 것은 아주 까다로운 일이다. 당시 쓰던 쌀에는 돌이나 껍질이 채 벗겨지지 않은 벼가 많았다. 나와 동생이 쌀에서 불순물을 골라낸 후에도 어머니는 쌀함박으로 여러 차례 불순물을 걸러내곤 하셨다. 아버지에 따르면 제사음식을 만드는 도중에 맛을 보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조상님이 맛보기 전에 먼저 음식을 먹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설날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의식은 차례이다. 아버지의 고집으로 우리 집에서는 보통 5시 이전에 차례를 지냈는데, 동생은 항상 잠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절을 하곤 했다. 다른 집 조상들보다 일찍 조상님께 식사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 고집의 이유였다. 나 또한 장남이었기에 제사상차림은 항상 집중해서 관찰했다. 아버지는 홍동백서, 좌포우혜, 어동육서, 반서갱동 하시며 상차림의 예들을 외우시곤 했다. 상차림과 제사 진행은 규칙도 많지만 순서도 복잡해서 아버지는 늘 헛갈리셨다. 그때마다 나는 전 제사에서 아버지가 했던 순서를 알려드려야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아버지는 순서가 헛갈릴 때마다 의례 내 쪽을 넌지시 바라보시곤 하셨고 나는 속으로 으쓱해지곤 했다. 올해 설에도 아버지는 어김없이 헛갈리고 계실 텐데, 이제 누가 그걸 바로잡아 주고 있을까.


 제사 때는 반드시 대문과 출입문을 조금씩 열어놓아야 하는데, 그 사이로 조상님이 들어오시기 때문이랬다. 문 여는 일은 항상 내 담당이었다. 대문에서부터 출입문까지 거리는 5미터 정도인데, 어둠 속에서 지나는 그 5미터는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대감과 두려움을 주었다. 기대감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혹시나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고, 두려움은 이미 죽은 사람과 어둠 속에서 함께 걷고 있다는 섬찟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늘 궁금했다. 제사에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오는지, 온다면 친가에서 올지 외가에서 올지. 나는 내가 친숙한 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오길 바랐지만, 그때마다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어쩌지 하는 걱정이 함께 들었다. 나는 대문을 여는 순간 휙 하고 들어오는 바람 속에서 어떤 때는 할아버지의 권련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어떤 때에는 내 귀에 대고 소곤소곤 옛말 이야기를 들려주던 외할머니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차례가 끝난 후에는 자매가 나란히 부모님께 세배를 드린다. 크리스마스를 쇠지 않는 북한에서 설날은 가족끼리 선물을 나누는 명절이기도 하다. 선물은 보통 겨울철 옷이나 모자, 혹은 평소에 갖고 싶어 했던 것을 부모님들이 기억했다가 사주곤 하셨다. 선물을 나눈 후에는 아침식사를 하는데 보통 제사음식에 만둣국이나 떡국을 곁들여 먹었다. 만두는 돼지고기와 시래기, 두부를 잘게 썰어서 함께 볶아낸 소를 넣은 것으로 어른 주먹보다 조금 작게 빚었다. 우리 집에서는 보통 당일에는 만둣국을 많이 먹었고, 떡국은 나중에 먹었다. 떡국을 만들기 위해 가래떡 모양의 긴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떡국대라고 한다. 가족이 함께 빚은 만두와 떡국대는 다 함께 밖에 내놓아 자연 냉동시킨다. 북쪽 지방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이후로 이따금 아침마다 조금씩 들여다 국에 넣어 먹는데 한 달 가까이 먹을 때도 있었다. 


 제사와 아침식사가 모두 끝나고 오후쯤 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은 동네 사람들의 마을회관 격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우리 집 윷놀이 판이 동네에서 제일 크고 멋져서라고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말 한마디 없다가도 손님만 오면 말 꾸러미를 풀어놓으셨는데, 지루한 러시아의 10월 혁명도 아버지 입을 거치고 나면 한 편의 스릴러처럼 흥미진진해졌다. 우리 집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부모님들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TV도 한몫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네에 TV가 있는 집은 우리 집을 포함해서 몇 집 안 되었다. 전기사정이 어려운 북한이지만 설날만큼은 전기가 공급된다. 어떤 사람들은 ‘전기도 명절공급’이라며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어쨌든 설에 이웃들이 모여 함께 TV를 보는 풍경도 내 추억의 중요한 부분이다. 교통사정상 친척들 간 왕래가 쉽지 않은 북한에서 이웃들 간 교류는 매우 중요하다. TV를 보다가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윷놀이가 시작된다. 윷놀이는 보통 가족단위로 편을 가르는데, 경기 승패로 한해 운수의 알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 승벽이 대단하다. 윷은 강낭콩으로 만든다. 북쪽 지방의 강낭콩은 줄당콩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 것보다 알이 크고 굵으며 큰 것은 어른의 엄지발가락만 한 것도 있다. 잘 영근 줄당콩은 윷으로 쓰기에 그저 그만이다. 보통의 줄당콩은 검은색인데 콩알에 일자로 흠집을 내면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승부욕이 지나쳐 바닥에 쾅쾅 뿌리다보면 때로 콩알이 박산나기도 한다.


 윷놀이가 아무리 신난다 해도 설날의 백미는 역시 연 날리기이다. 특히 나에게 연날리기는 새해를 멋지게 시작하는 일종의 의례였다. 나는 동생과 함께 벌거숭이 뒷산으로 올라간다. 거기서는 벌써 동네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계절풍은 연 날리기엔 안성맞춤이지만, 시베리아의 찬 기운은 매섭게도 시리다. 하지만 아무리 추운 날씨도 아이들을 방구석에 잡아둘 수는 없다. 적절한 위치를 잡고 내 신호에 따라 동생이 잡고 있던 연을 놓는 순간 연은 마치 새매처럼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우리 마음도 덩달아 연과 함께 붕붕 뜬다. 많은 연들 중에 내 것이 제일 크고, 제일 높이 난다. 아이들이 주변에 모여들어 와와 감탄한다. 연은 우쭐한 내 마음인양 바람을 타고 잘도 춤을 춘다. 어느덧 연실이 다 풀려서 연이 하나의 점으로 까마득해지면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할아버지 말씀에 당신이 어렸을 적에는 연을 대문짝만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연살은 대나무로 만들고, 연실은 명주실을 밧줄처럼 여러 겹으로 꼬아서 썼다고 한다. 연 종이는 창호지를 겹쳐서 풀칠해서 썼단다. 그리고 혼자서 띄우지 못하고 여러 명이 함께 날려야 했다고. 나는 어느새 한없는 공상에 빠져든다. 자기도 날려보겠다고 콩콩 뛰던 동생은 손을 호호 불며 조금 날려 보더니 이내 춥다고 집으로 내려가 버렸다. 하지만 내 공상은 계속된다. 만약 연을 크게 만들 수만 있다면 내가 그 위에 탈 수도 있을 텐데. 아니면 줄을 튼튼하게 만들어서 매달릴 수라도 있을 테지. 큰 연을 만들자면 뭐가 필요 하지? 대나무는 애용하는 낚싯대를 쓰면 되겠고, 연줄은 낚싯줄을 몇 겹으로 엮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종이를 어디서 구한담. 종이만 구할 수 있다면 다음 해에는 큰 연을 만들어 볼 수 있을 거야. 어느새 겨울의 짧은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고, 나는 천천히 연줄을 감는다. 설날이 저물고 있는 것이었다. 


 설날이 지난 이후에도 나는 종종 연을 띄웠다. 그리고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문득 이제 연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석양 녘 연을 들고 뒷동산에 올랐다. 뒷산에 오르기 전 크레용으로 ‘조국통일’, 그리고 ‘2001축’이라고 쓴 글자를 한 번 더 진하게 덧칠했다. 나는 따라오겠다는 동생을 기어코 떼어놓고 갔다. 왠지 둘만의 이별로 간직하고 싶었다. 바람은 여전히 남쪽으로 불고 있었고 차가웠다. 그곳에는 오직 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연을 띄우고 연줄을 풀었다. 연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 높이 잘도 올라갔다. 힘차게 돌아가던 얼레가 멈춰 서고 가벼운 충격이 내 손으로 전해질 때 내 마음이 철렁했다. 잠시 동안 마음의 갈등 후, 얼레에 묶여 있는 연실의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나는 실의 끝이 얼레를 스쳐 지나다 손끝에서 잠깐 멈추었던 찰나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연 또한 나처럼 떠나기를 잠시 망설이었음을 확신했다. 상실의 순간이자 자유의 순간이었다. 점이던 연은 먼지가 되더니 점차 공기가 되었다. 연이 사라진 내 눈 속에서 물방울이 솟아났다. 나는 고통과 쾌감을 함께 느꼈다. 그 순간의 아련한 상실감은 내 영혼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 고통과 쾌감은 첫사랑을 추억할 때의 감정과 닮았고,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의 추억을 소중히 꺼내 보듯이 나도 그때를 소중히 추억한다. 10대가 지나서는 연을 다시 띄워본 적은 없지만 20대, 30대의 나는 시절에 연을 날리던 감성의 언덕을 여전히 오르내리고 있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다가오고 이런 꿈을 꾸고 나면, 나는 그 2001년의 그 연이 유독 눈에 삼삼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날려 보낸 그 연을 찾아 떠나고 싶어 진다. 그 연은 과연 남쪽 나라의 어느 산발에 걸려 내려앉아 있을까. 20년의 풍상에 덧칠해진 크레용 자국은 얼마나 바래졌을까. 만약 기적이 그 연을 찾아 떠난 나에게 재회를 허용해준다면, 나는 묻고 싶다. 창공을 날으는 자유가 상실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던가를, 그 자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었던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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