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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Aug 03. 2021

고향의 여름

남한에서 부채의 실용적 가치는 이제 사라진 듯합니다. 삼복더위에도 에어컨 바람에 감기들 걱정을 하고, 성능 좋은 휴대용 선풍기 가격은 웬만한 부채보다 싸니까요. 하지만 “하짓날 선물은 부채요, 동짓날 선물은 달력”이라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는 북한에서 부채는 아직도 친숙한 여름철 아이템입니다. 남한에 온 이후에도 저는 하지 무렵이면 종종 인사동으로 부채를 사러 가곤 합니다. 부채가 더위를 조금씩 밀어낼 때마다 그 자리를 서서히 메우는 건 고향의 여름 추억입니다.


추억 하나나의 원두막

어릴 적 고향의 시간은 새김질하는 황소의 달구지 바퀴와 더불어 천천히 흘렀습니다. 개구리가 개골개골 짝을 찾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무렵에 우리의 원두막 생활은 시작되어 들판에 들국화 피는 계절까지 계속되었답니다. 원두막이라고 했지만, 생김새부터 남한에서 보던 그런 종류의 모양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여름을 시원하게 식혀줄 수박도 없습니다. 원래 용도가 옥수수밭 도둑을 감시하기 위한 거라 높이 자체가 다 자란 옥수수 키보다 훨씬 높습니다. 한국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두막과는 달리 빠른 밭작물들이 익어가는 초여름에 만들어져서 수확이 끝나는 가을에는 허뭅니다. 우리끼리는 뜸막(띠, 부들 따위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움막)이라고 불렀는데, 방학 동안에는 아예 여기서 산다. 아침저녁으로 동생이 날라다 주는 도시락을 먹고, 더우면 밭 옆에 있는 강가에 뛰어듭니다. 심심하면 책을 읽고, 그래도 무료함을 떨칠 수 없으면, 이웃 뜸막으로 놀러 갑니다. 200 미터 정도 사이를 두고 뜸막이 하나씩 있었는데, 옥수수가 익어가는 계절에는 이웃의 아저씨가 불을 지펴 옥수수를 구워주시곤 했습니다. 이따금 아저씨의 술 심부름도 했지요. 내 몫의 알사탕 값도 빼놓지 않으셨던 인심 좋은 아저씨셨답니다.     

 사실 방학 동안에는 무료할 사이가 없습니다. 밤낮없이 친구들이 뜸막에 찾아들었으니까요. 누구의 배에선가 쪼르륵 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는 뒷동산 과수원의 붉은 윤기가 반지르르 한 추리(자두) 생각에 군침을 꿀꺽 삼키곤 했습니다. 곧 추리 서리를 위한 습격조가 편성되고 작전계획이 세워지죠. 습격에 나갈 친구들은 가위바위보로 정해지며 예외란 없습니다. 때로는 나무에서 떨어지고, 때로는 들고뛰다 넘어져 무릎이 까지면서도 자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간혹 경비원 아저씨에게 잡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싸대기는 기본이고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부르거나, 팔목이 거의 부러질 때까지 푸시업을 하는 고역을 감수해야 했지요. 과수원 경비원 아저씨는 우리 어린 시절의 가장 고약한 어른이었습니다.


추억 둘천렵

 여름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역시 물가만 한 곳이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천렵은 그 시절 여름이 기다려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답니다. 동네 아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습니다. 뭐 특별히 조직자가 있어서 참가 신청을 받거나 일정 공지를 하는 것도 아닌데, 정작 당일에는 올망졸망 아이들이 잘도 모였지요. 천렵에는 암묵적인 지침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어죽을 끓일 솥은 내가 맡고, 불을 지필 장작은 네가 맡는 식이죠. 이것은 거의 의례와 같은 것이어서 혹시라도 솥을 맡은 친구가 못 오더라도 솥은 와있어야 한답니다. 천렵에 오는 각자는 개인 숟가락과 쌀 한 줌 정도씩, 그리고 고춧가루나 마늘, 참깨, 콩기름 같은 조미료를 한 가지 정도 챙겨가야 합니다. 이런 매뉴얼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마치 물고기가 헤엄치는 법을 배우듯 자연스럽게 알아버렸던 것 같아요. 우리가 어죽 써먹는 곳은 주로 마을에서 30분쯤 떨어진 강가 너럭바위 주변이었는데, 우리가 아이들을 불러내어 그곳에 도착할 때쯤이면 벌써 힘센 형들 네댓이 강 아래쪽에서부터 반두질 하며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형들은 우리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버들치, 종개(미꾸라지와 비슷한 민물고기), 가물치 등 다양한 어종의 고기들을 통에서 와르르 쏟아 놓을 때면 빙 둘러선 아이들은 와~하고 탄성을 지었습니다. 나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느라 시골을 떠나야 했기에 끝내 동생들의 우상이 될 기회를 얻지 못했답니다. 너럭바위 아래에는 강물이 푸르게 고여 있어서 헤엄치기에 제격이었습니다. 어죽을 쓰는 동안 일부는 불을 피우고, 일부는 어죽이 늘어 붙지 않도록 저어주고 일부는 물에 뛰어들어 미역을 감고, 또 일부는 누나들 등에 업혀 온 젖먹이들과 놀아주기도 합니다. 드디어 어죽이 완성되면 호호 불어가며 먹어대는데 워낙에 별의별 재료가 다 들어간 터라 그 맛이 정말 일품이랍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짓궂은 표현대로) ‘배꼽이 활짝 웃도록’ 먹어댔어요. 연기에 그을린 가마 주변에 열댓 명의 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웃고 떠들며 어죽을 먹던 그 동화 같은 풍경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지금쯤 내 원두막은 누가 지키고 있을까요. 이웃 원두막 아저씨는 또 얼마나 늙으셨을까요. 아마도 올해 복날에는 누나 등에 업혀 있던 그 아기가 이제 늠름하게 반두를 잡고 또 다른 아이들의 우상이 되어있을 테지요.      


 요즘 젊은 세대에겐 저의 고향 추억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나 들을 법한 이야기일 겁니다. 실제로 제가 만났던 어르신들 중에 저와 비슷한 유년 시절을 보내신 분들이 많은 걸 보면 남북한의 시간은 한 세대의 시차를 두고 흘러가는 듯합니다. 원두막 대신 텐트를 챙겨 캠핑하러 가고 수박 대신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물리치는 여름이 어느덧 익숙해진 저의 마음속에는 추억을 산책하는 어르신과 현재를 탐험하는 젊은이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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