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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Jan 19. 2021

포도 눈

구렁이는 왜 한숨을 쉬었을까

포도 눈     


세상이 구린 트림을 해대면

기억의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내 기억은 촛불처럼 짧아 

추억에로의 기차는 경적을 울리고     


뜨거운 촛불 눈물 한 방울에 추억 한 모금

그 속에 잠들어 있는 못다 쓴 일기 조각     


천장에서 내려온 구렁이에 질겁했던 날

구렁이가 벗어놓은 황금빛 허물을 뒤집어쓰고

밤새 꿈을 헤맸다     


돌 맞은 구렁이는 복숭아 나뭇가지에 걸려

짓이겨진 꼬리가 바람에 흔들흔들


사라진 눈 대신에 벌어진 입 사이로 

눈물이 흐르고 

끓는 쉬파리의 장송곡에는 

감동이 흐르고     


어느 아침 구렁이는 구더기로 화했고

그걸 탐식한 암탉은 털이 빠져 버리고     


닭다리 뜯는 아저씨 

그 대머리에서 자라나는 머리카락 한 오리     


불어오는 실바람에

그 한 오리 뿌리째 뽑히고

포도나무 넝쿨에 사뿐히 내려앉아 

늘어진 기지개를 해댄다     


기지개 한 번에 조금씩 늘어나

손가락만큼, 다음엔 지팡이만큼

길쭉하던 몸뚱이가 비틀리고 꼬아질 때


아, 저것은 구렁이다      


끝이 쩍 갈라지더니 시뻘건 입이 드러나 

포도송이를 덥석 삼켜버린다     


구렁이가 감고 있던 눈을 뜨니 

아, 저것은 포도알이다

쉰한 개의 포도알     


정 없는 눈알들이 천장에서 나를 노려보고

나는 설익은 포도 맛을 떠올리며 

신 침을 삼켰다     


까만 눈 두 개, 파란 눈 쉰한 개 


가위는 내 입술을 잘근잘근 썰었고

구렁이는 내 눈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1초, 2초, 3초…


갑자기 구렁이 큰 입이 쩍 벌어지고

길게 하품한다     


하품 뒤에 따라오는 큰 한숨, 한숨

휘파람, 휘파람

휘파람이 촛불을 꺼버렸다     


나는 또 일기를 마무리하지 못했음을 

문득 깨닫고 

삶의 숙제에 한탄한다     


하나 어찌하리

촛불 눈물 식기 전에 

그 속을 벗어나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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