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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Jan 25. 2021

손이 꽁꽁꽁, 발이 꽁꽁꽁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붙잡아 보는 북한 겨울 - 썰매 추억

겨울은 지상의 모든 것을 얼리고 움츠러뜨리지만 아이들만은 제외다. 손발이 꽁꽁 어는 줄도 모르고 뛰놀던 어릴 적 내 고향의 겨울은 낭만의 계절이었다.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아이와 장독은 얼지 않는다고. 북방의 겨울은 참 춥다. 10월 중순경이면 벌써 북변의 매서운 삭풍이 아직 밭에서 채 거둬들이지 못한 감자를 얼려버린다. 11월 초부터 강의 양쪽 기슭으로부터 중심을 향해 느리게 전진하던 얼음이 11월 말쯤이면 강줄기 전체를 지상에서 말끔하게 지워버린다. 한 겨울에 백두산 기슭의 호수는 바닥까지 얼어붙어 다음 해 5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녹는다. 처음 남한에 도착한 시기가 12월이었는데, 그해에 서울의 겨울이 얼마나 따뜻했던지 겨울이 언제 오나 기다리다 봄을 맞았다. 아마도 ‘춥다’는 표현은 남북의 의미 차가 가장 큰 어휘 중 하나일 것이다.


결코 할머니 말씀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고향에서 열여섯 번 겨울을 맞고 보내는 동안 우리 집 장독은 여전히 건재했고 내 친구들 중 어른이 되기 전에 얼어 터진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할머니가 하셨던 말은 참으로 우리에게 유용했다. 간혹 부모님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노는 것을 걱정하시기라도 하면 나와 친구들은 할머니에게서 배운 말을 노래처럼 합창하곤 했다.


“아이와 장독은 얼지 않습니다!

  아이와 장독은 얼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입가에는 의례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고, 그 미소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우리는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겨울의 바깥세상은 천국이다. 우선 거기에는 어른들이 없다. 간혹 잠깐 밖으로 나왔던 어른들도 결코 밖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흰 눈 쌓인 언덕은 아이들의 썰매장이고 얼어붙은 강판은 아이들의 스케이트장이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 뒷산 중턱에서 시작해서 공동묘지가 있는 골짜기를 돌고 제지공장 뒤편을 거쳐 전문학교 정문 앞까지 내려오는 썰매 코스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칠 줄 모르는 아이들이 줄을 맞춰 눈보라를 일으키며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은 누구나 한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한 시간 가까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걸어 올라간 코스를 단 몇 분 만에 살같이 내려오는 재미는 많은 아이들이 점심밥을 포기하게 했다.


 어떤 썰매를 갖고 있는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두텁고 튼튼한 널빤지를 대패로 미끈하게 다듬고 썰매의 양발에는 철근을 덧댄 다음 반듯하게 잘 다스려야 한다. 보기에 멋질 뿐 아니라 눈 위에서 잘 미끄러져야 썰매 경기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겨울,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썰매를 갖게 되었다. 부엌 장판널로 쓰려던 널빤지로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날렵하고 튼튼한 썰매는 그해 겨울방학 둘도 없는 내 자부심이었다.


 얼어붙은 강바닥은 겨울이 우리에게 준 또 다른 선물, 노천 빙상장이었다. 높은 학년 형들은 스케이트를 탔고 누구도 우리는 외발기를 탔다. 외발기는 발귀에서 유래되었다. 발귀는 발구의 함경도 방언인데 발구는 썰매를 일컫는 말이다. 즉 외발기는 외썰매이다. 보통의 썰매는 양발이지만 외썰매, 즉 외발기는 한발인 것이다. 두 개의 지팡이를 지지대로 삼아 몸으로 중심을 잡고 지팡이를 이용해 앞으로 지친다. 지팡이감으로는 노가지 나무가 제격이다. 향나무 비슷하게 생겼는데 도낏자루나 쇠코뚜레 쓰일 정도로 단단해서 아이들이 가장 선호한다.


 처음 배울 때는 중심 잡기가 쉽지 않아 자주 넘어지지만 일단 타는 법을 익히면 스케이트 못지않게 빠르다. 잘 타는 아이들은 온갖 묘기를 다 부리며 얼음판 위를 누빈다. 때로는 외발기를 탄 채 얼음구멍을 뛰어넘으며 재주넘기도 하고 때로는 편을 나눠 아이스하키도 하는데 실력과 승부욕이 다 같이 만만치 않다. 그 시절을 추억하노라면 봄이 오는 이유가 아이들이 뿜어내던 넘치는 열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겨울의 짧은 해가 서산으로 굴러 떨어지면 우리는 긴 지팡이를 거두어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내 집 온돌방 아랫목에서 꽁꽁 언 손발이 녹기도 전에 나는 꿈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짧고 달콤한 밤들 몇 개가 어느새 지나고 우리 낭만의 계절, 겨울이 그렇게 지나갈 때 우리는 문득 커 있었다. 그리고 겨울을 두려워하는 어른이 되어 오직 추억으로만 언 손을 호호 불어 녹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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