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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Feb 14. 2021

Mask for 2021

탈북자가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2020년  대한민국에  두  개의  바이러스가  배회하고  있다.  코로나와  혐오의  바이러스.

2020년의  한국을  살아가는  탈북자는  이  바이러스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겪고  있을까.


코로나와  혐오,  둘은  심술궂은  아버지의  배다른  두  자식같이  닮아있다.  게다가  그  고약한  악취를  주변으로  끊임없이  전파한다.  그야말로  바이러스의  속성이라  하겠다.  두  녀석은  똑같이 고약한  심보를  물려받았지만,  성격은  제  각각이다.


바이러스  형제

  미욱한  형-코로나가  우리  육체를  파괴한다면  동생–혐오는  교활하게  우리의  정신을  파고든다. 인간은  눈에  띄는  육체의  공격에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만  영혼을  좀  먹는  공격에는  무력하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  순간부터  격리되고  치료를  받지만  혐오  바이러스는 감염의  경로가  은밀하고  잠복에  능하여  적극적인  격리나  치료가  어렵다.  본인이  감염된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의  정신은  일단  그  구조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을  먹여주고 살찌워주는  경향이  있어서  혐오의  바이러스는  감염자의  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며  또  다른 숙주를  찾는다.


 형이  무차별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괴롭힌다면  동생의  공격 취향은  매우  뚜렷한  편이다.  그는  항상  힘없는  집단을  겨냥한다.  어쩌면  코로나는  2020년을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에게  최대의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혐오는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사회적  약자는  혐오라는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기름진  먹잇감인  것이다. 때로  취향  타는  동생  녀석의  집요한  공격에 비해  미욱한  형의  차별  없는  공격이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사회적 약자의  슬픈  자기 위안이다. 형은  늘  동생을  부추긴다.


  형이  강남의  블랙 수면방  기상  벨을  울려댈 때  동생은  동성애  커뮤니티  위를  배회했고  청주에  사는  탈북민이  광화문 집회에  왔던  날에는  형  동생  나란히  탈북자 커뮤니티에  쳐들어왔다.  혐오에  감염된  언론은  소수자  사이에서  코로나  확진자를  발견하기에  바쁘고  혐오  바이러스는  삽시에  반도를  뒤덮는다.


 형의  행패가  노골적이고  공개적이라면  동생은  익명성에  기대어  은밀하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노린내를  풍긴다.  탈북자  코로나 확진  뉴스가  나왔던  8월의  어느  아침,  탈북민  커뮤니티에는  서리가  내렸다.  뉴스 기사의  댓글이  뿜어내는  열기도  그  서리를  녹이지  못했다.  오히려  그 열기의  아지랑이  속에서  탈북자의  지위는  매우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댓글에서는  악취가  풍겼고,  거기에  파리처럼  다닥다닥  매어 달린  'like'  더미가  뿜어내는  영향력은  고매한  헌법의  가치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혐오의  바닷속에서  출생과  함께  부여받았다는  ‘국민의  자격’은  국민과  동포 사이  그  어딘가로  애처롭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혼자서  무척이나  화가  나있었다.


혐오  들여다보기

나는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서  잡아낸  혐오라는  바이러스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정의의  베레모에  권리라는  푸른  별을  달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이라는 화려한  정장에  은밀성이라는  익명의  스니커즈를  신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벗겨  보았다.  그  안에는  편견의  초라한  셔츠가  있는가 하면  분노로  너덜너덜한  팬티도  있었다.  공포의 양말을  벗겨내자  자기애가  부끄러운  듯  쪼그리고  있었다.  이쯤 해서  희미하던  혐오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도  희미해서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드러난  혐오는  무관심의  얼굴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  뒤로  내  얼굴이  겹쳐졌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관심한  영혼은  혐오의  온상이었다.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영혼은  다수의  생각과  통념에  쉽게  휘둘리고,  그러한  통념  중  일부는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한  끗  차이인  경우가  많다.  


 무릇  무관심한  마음은  무지상태로  방치되기  일쑤이고  원래  모든  혐오의  계보를  따라가  보면  영락없이  무지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조상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조상님이  닦아놓은  대통로를  따라  혐오가  무관심  속으로  안착하기만  하면  그것은  끊임없이  비대해지며  스스로를  강화한다.  그리고  최적의  서식지에서  먹잇감을  노린다.


 나는  내  마음에도  몇  개의  온상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거기서  자라는  혐오의  근원을  생각해보다가  어디서  왔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그  바이러스의  뿌리를  한  오리씩  뽑아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금방  도사리고  앉는  것은  새로운  놈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그  자리에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심어  공감으로  기르기  전에는  그놈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2020년에  몰아친  코로나  바이러스를  견제한  1등 공신은  아마도 마스크일 것이다.  백신  도입도  눈앞에  있으니  2021년의  우리에게  코로나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혐오라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어떤  마스크가  필요하며,  또  어떤  백신을  준비해야  할까.


 이  사회의  소수자로서,  그리고  혐오의  공공연한  대상으로서  나는  2021년의  우리 사회에  “깨어있음의  마스크”와  “관심의  백신”을  제안하고  싶다.  사회의  곳곳에  혐오에  시달리는  소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어느  측면에서는  소수자인  동시에  심각한  마이너리티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 소수자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당신은  혐오라는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존재로  던져지게  된다는  것,  이것을  인지하는  것은  혐오  바이러스  방지를  위한  좋은  마스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 기반한 공감,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노력할  용의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코로나 백신보다  먼저  혐오  바이러스  백신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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