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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나 Aug 23. 2023

내 늙은 엄마를 보내며





산 너울에 두 두우우웅실, 흘러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알리라 내 마음을, 부평초 같은 마음을.

한 송이 구름 꽃을 피우기 위해 떠도는 유랑별처럼

내 마음 별과 같이, 저 하늘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리.  

(내 마음 별과 같이, 현철)



  세계가 무너진 날 밤이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세상이 어떻게 되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랬다는 것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앰뷸런스 속에서 생각났던 건, ‘산 너울에 두둥실-’로 시작하는 그 노래 한 구절뿐이었다. 그것은 오래된 TV의 지직대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결국 정신이 멍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우주가 전부 무너져 내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너진 폐허에서 살아남은 것이라고는 그 조그만 볼록 브라운관의 TV와, 그 안에서 노곤한 목소리로 대중가요를 부르는 중년의 남자가수 한 명, 그리고 나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길고 어둡고 추운 밤이었다.






  잘생긴 새아빠는 시내에서도 꽤 고급 요리를 내놓는 경양식집의 부지배인이었다. 그 레스토랑은 늘 멜로디가 아름다운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곳이었는데, 나중에 자라서 생각해 보니 그건 모두 비틀스나 존 레논 솔로 시절의 유명 곡들이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엄마가 돌아가신 뒤 그는 우리를 데리고 곧장 내 외할아버지 집으로 밀고 들어갔다. 외할아버지의 입장에선 기가 막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것이다. 근본도 알 수 없는 놈이 당신 딸의 새 남편이랍시고, 가뜩이나 눈엣가시인 여식의 두 어린 딸들까지 끼고 불시에 들이닥치니 그럴 만도 했다. 당시 나는 아홉 살이었고, 동생은 일곱 살이었다. 그 집에 도착하자 외할아버진 호랑이 같은 얼굴로 우리 셋을 차례로 노려봤는데, 그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눈을 본 나는 정말이지 무서워서 숨이 탁 막힐 정도였다.


  엄마는 혼자 억척스럽게 경영하던 떡갈비 집 배달을 하필 손수 나갔다가 2톤짜리 화물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엄마의 인생은 너무나도 힘겨운 것이었다. 난 한 번도 엄마가 생기 있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싱크대를 한 손으로 짚고 서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모습이다. 세제로 그릇을 문지를 적에는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모두 써야 했지만, 그게 끝나고 나면 곧장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왼손으로 싱크대를 붙들고 남은 오른손만을 사용해서 그릇에 묻은 거품을 헹구는 것이다. 설거지를 힘겹게 끝낸 엄마는 곧장 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부엌 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곤 했다.


  엄마의 사고 소식은 새아빠가 전해주었다. 그날 그 흰 얼굴이 대리석처럼 더 새하얗게 굳은 새아빠는 발을 쿵쿵 구르며 집으로 들어와서는 “얘들아, 병원 가자.”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아직 서먹서먹했던 그에게 어딜 가는 거냐고 물을 엄두도 못 낸 채, 떡갈비 배달 승합차에 쭈뼛거리며 올라탔다. 오토바이가 아니라 승합차만 탔었어도 그렇게 즉사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영안실 바깥을 서성거리던 작은 외할머니가 혀를 차며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그 승합차는 엄마가 떡갈비 집을 오픈하고 몇 달 뒤에 중고로 구매했던 것이다. 단체 주문이 들어올 때가 종종 있어 오토바이 외에도 좀 더 큰 배달차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엄마는 영업이 끝난 어느 일요일, 갑자기 집으로 전화를 해서 새아빠와 우리 자매를 집 앞으로 불러냈었다. 거기에 그 빨간 승합차가 있었다. 도무지 우리나라에서 만든 차 같이 생기지 않은, 마치 클레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귀여운 주인공들이 타는 장난감 자동차 같아 보이는 그 승합차를 타고 우리는 밤 열두 시가 넘도록 시내를 돌고 또 돌며 시승식을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넷은 가게로 돌아가 엄마가 식당을 운영하며 짬짬이 만들어 둔 찹쌀도나스를 두 개씩 들고 먹었다.


  그 승합차는 엄마가 죽은 뒤에 헐값에 팔려갔다. 나와 동생은 마지막으로 사진 좀 찍자는 새아빠의 고집 때문에 그 승합차 앞에 둘이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했는데, 그때 나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든 새아빠의 손이 무척이나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진을 두 방 찍었나 싶었는데 갑자기 그는 흙바닥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았고, 곧 땅을 치면서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어린애같이 굴 때가 자주 있었다. 담뱃값이 없다고 엄마를 조를 적에는 내 동생보다도 더 어린애 같았다. 한 번은 엄마와 그가 대판 싸운 날 엄마가 우릴 데리고 떠나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또 애처럼 펑펑 울면서 엄마의 한쪽 다릴 잡고 늘어졌다. 결국 엄마는 늘 그랬듯이 우리들에게 눈을 찡긋 해 보이고는 못 이긴 척 새아빠를 용서해 주었다. 난 속으로 '저 눈물이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으니 앞으로도 새아빠가 계속 눈물 연기를 잘했으면' 하고 바랐다. 새아빠가 집에서 쫓겨나는 건 나도 싫었으니까.


  우리 엄마와 새아빠가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부지배인으로 있던 경양식 집에 우리 세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러 갔을 때였다고 했다. 나와 내 동생이 소스를 듬뿍 얹은 돈가스에 넋이 나가 있을 때 엄마와 그의 사이에선 애틋한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새아빠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세 살 연상인 우리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가 엄마를 쫓아다니면서 끈질기게 사랑고백을 했고, 친아빠와 사별한 엄마의 팍팍한 마음이 그의 사랑에 거짓말처럼 녹아버렸을 것이다.


  친아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내가 네 살이고 동생이 두 살이었을 때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주 키가 크고 모자를 쓰고 다녔던 기억만이 전부이다. 내가 여섯 살 정도 되었을 때 친할머니라는 사람이 찾아와 들려준 바에 의하면 우리 아빠는 옛날 옛적에 할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아빠의 아빠와 함께 인왕산에 사냥을 갔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혀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야길 들은 이후부터 나는 친할아버지와 아빠의 모습을 털이 복슬복슬한 모자를 쓰고 기다란 엽총을 둘러멘 사냥꾼들로 상상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는 실제로 아버지 직업란에 ‘사냥꾼’이라고 써넣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때 담임선생님이 그걸 보고도 그냥 모른 척해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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