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란제리>는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 80살이 된 마르타가 친구들과 함께 속옷가게를 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려낸 영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 죽기만을 바라며 살아가는 마르타는 어느 날 시내 속옷가게를 가게 되면서 20대 때 가졌던 꿈을 다시 꾸게 된다.
주위 친구들의 도움으로 마을에 속옷가게를 열게 되지만 목사인 아들과 마을사람들의 비웃음과 방해공작으로 포기하려 한다.
60년 넘게 마음에 담아두었던 꿈을 80살에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도 마을이미지를 해친다며 마을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속옷가게를 연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주위의 괴롭힘에 좌절하는 그녀에게 힘과 열정을 불어넣어주는, 그녀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
아버지를 병원에 데려다 주기 싫어 아버지를 요양원에 맡기려는 아들에 맞서 운전면허를 따는 할머니, 친구가 만든 속옷을 팔기 위해 인터넷을 배우는 할머니, 음탕한 여인으로 낙인찍혔지만 당당하게 그녀의 삶을 살면서 벗의 꿈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할머니, "란제리 디자이너"란 꿈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할머니.
이 네 명의 할머니가 보여주는 유쾌한 연대는 4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준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는가?
40년 넘게 버리지 못하고 가구 깊숙이 넣어두었던 꿈이 있는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주변의 편견과 나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이가 있고, 가정이 있다는 이유로 나는 꿈보다는 적당한 일과 적당한 돈을 쫓아 살아 왔다. 그리고 꿈을 얘기하지 못했다. 요즘 시대에 내 나이에 꿈을 얘기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고 이기적인 소리라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르타의 열정이 부러웠다.
누구나 사는 똑같은 삶이 아닌 벗들과 함께 꿈이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노인이 나오는 영화를 굳이 찾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꼰대'
'몸의 아픔'
'고집'
'돌봄'
'가부장적'
'오랜 경험으로 터득하게 된 사람에 대한 무신뢰' 등
나는 절대로 그렇게 늙지 않겠다며 노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있었다.
하지만 노희경 작가의 '디어마이프렌즈'는 노인을 직접 '꼰대'라 표현하면서도 어쩌면 그녀도 나처럼 늙어가는 것이 싫고, 현실을 잘 살아보고자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며, 그동안의 삶을 인정하기에는 가슴 아프고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다.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는 “요즘 누가 꼰대들 얘기를 돈 주고 읽어. 요즘 지들 부모한테도 관심 없어”라고 소리치던 박완이란 30대 여성이 ‘꼰대’라고 부르는 엄마와 그녀의 친구들과 지지고 볶는 일상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내고 있는” 자신의 늙은 친구들을 이해하게 되는 드라마다.
그들의 계획처럼 늙어서 함께 살 수는 없게 되었지만 델마와 루이스처럼 “죽을 때 죽더라도 길 위에서 죽자”며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이 드라마는 끝이 난다.
자식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인양 자신의 남아 있는 삶을 무기력하게 자식에게만 의지하는 그런 노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좋았다.
늙어간다는 것은 두려움이다.내가 아는 노인은 아프고, 가난하고, 자식에게 의지하는 그런 존재다.
나에게 그들은 그동안의 삶이 삭제된 채 결론만 남아있는 존재다.
노희경 작가는 글에서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라며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것 아닌가 싶었다."라고 말했다.하지만 드라마 마지막에는 박완의 목소리를 빌려 “그들은 자신들의 지난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것처럼, 지금 순간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박완의 대사는 나에게도 큰 울림을 줬다.
나만이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주위에는 위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노인은 없었다. 가족을 책임졌다며, 오랜 세월을 경험했다며 대접과 복종만을 원하는 '꼰대'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저항하다, 상처받다, 들이받다, 나가떨어져 이젠 그들이 지긋지긋하게 싫을 뿐이었다.
박완이 엄마에게 “나는 엄마 것이 아니야” 라고 소리지르는 장면을 보면서 나 또한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내 부모에게 저렇게 미친년처럼 소리지르며 지난 상처를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부모에 대한 어려움과 두려움, 미안함들이 뒤섞여 그들과의 소통을 막았고 대신 보살핌을 받았던 우리가 이젠 그들을 돌볼 차례가 되었다.
위 두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노인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어쩌면 그들도 나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고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 최소의 것만을 요구하면서 정을 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노인에 대한 편견과 그들에 대한 책임이 싫어 나 스스로 그들을 회피하기 위해 갖가지 이유들을 만들어내 저항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40대 중반인 나는 이제 노인을 준비해야 한다.노후를 여유롭게 지낼 돈이 있으면 더 좋겠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면 나의 삶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그 ‘꼰대’의 모습으로 내가 아는 어떤 노인처럼 돈 때문에, 돈이 아까워 소통 없이, 외롭게, 다른 이를 탓하며 늙어갈지도 모르겠다.
노인을 준비하기 위한 첫 번째는
질문으로 시작해 보려한다.
‘너는 누구와,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사랑을 꿈꾸지 않는, 사람을 믿지 않는, 더 이상 열정은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하면서 꿈을 갖지 않는 그런 유령 같은 존재로 살 것인가?
아프지만, 두렵지만,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처럼 사랑하면서 치열하고 당당하게 삶을 살아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