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옹이놀이터 Oct 14. 2017

D-DAY

- 80살의 여행을 꿈꾼다 -

D-6 나눔 장터   

 

80평생 나는 많은 짐들을 재산인양 쌓아놓고 살았다. 쌓기 위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내 키보다 높은 선반수납장에 이것저것 불필요한 물건들이 아직도 가득하다.

덕분에 나의 공간은 좁아졌고, 누가 주인인지도 모를 그곳에서 떠나지도 못한 채 살고 있다.

사실 그 물건들을 볼 때면 나의 미련들을 마주하는 것 같아 좋지 않다.

누군가와 나뉘어도 좋으련만 언젠가는 쓰겠지 하며 그렇게 오랜 세월 집귀신을 만들어놨으니,

이젠 그것들을 다른 이와 나눌 때가 되었다 싶었다. 

며칠 전 동네 카톡방에 나의 앞으로의 일정과 집물건 정리 계획을 올렸다. 처음에는 걱정스런 메시지들이 올라왔지만 이내 나중에는 나의 계획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며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달라는 메시지들이 올라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오늘은 나눔 장터 첫날.

현관문 앞 화단 근처에 돗자리를 깔고 물건들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옆에 작은 함도 놓았다.

어제 열심히 편집해서 프린터해 놓은 설명서도 함께 붙여놓았다.

“맘에 드는 물건을 가져가세요. 다만 각자에 맞는 가격을 매겨 함에 넣고 가져가시면 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그냥 가져가도 좋습니다.”

물건을 정리한다는 것은 조금은 허탈하다. 

있던 자리에 빈공간이 생기고, 그 물건에 대한 나의 기억도, 추억도 지워질 것 같아서 일까?

하지만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비워냈다.

샌드위치 기계, 미싱, 전자레인지, 다양한 그릇과 냄비, 찻잔, 전기장판, 돗자리, 카세트등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도대체 어디에 들어가 있었는지 ....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로 앞마당을 넘어 길가까지 펼쳐졌다. 

나는 현관문을 열어놓은 채 7080노래를 틀어놓았다. 그리고 거실에 아껴두었던 차와 잔을 준비해두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 나를 들뜨게 했다.

오전 8시를 알리는 시계종이 울리자 여기저기서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D-5 언니    


장터는 계속되었다. 

오늘은 잠시 짬을 내어 동네 벗에게 집을 맡기고 언니를 만나러 나왔다. 

언니는 서울에서 했던 치킨집이 잘되어 10년 전 그곳을 좋은 값에 매각하고, 이젠 내 옆에 살고 싶다며 전주로 내려왔다. 우린 가끔 영화도 보고, 맛집도 찾아다녔다.

언니는 그럴 때마다 좀 더 일찍 이렇게 살지 못한 것이 늘 후회스럽다고 했다.

형부가 바람이 났을 때 보내줬어야 했다고……. 그 덕에 아픈 형부를 오랫동안 간호하고 책임져야 했다.

결혼부터 지금까지 언니의 삶은 참으로 고되고 무거웠다.

다행이 좋은 기회로 통닭집을 인수받아 언니의 노후는 편안할 수 있었다.

언니 나이도 이젠 90을 바라보니 우리가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해진다. 외로운 언니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것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하지만 나 또한 시간이 없기에 언니의 지지를 받고 싶었다. 벨을 누르고 난 후 언니가 문을 열었다.     


D-4 집    


40대 중반 의도치 않게 나는 집짓는 곳에서 일을 했다. 집을 짓는 것은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 많은 돈을 들여 꼭 나의 집을 지어야 하나? 그들에게 집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에게 그것은 일종의 사치로 느껴졌다.

하지만 집을 한 채, 두 채 짓다보니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만의 작은 집을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설계하고 내가 차근차근 지을 수 있는 집. 돈으로 지어지는 집이 아닌 나의 손길로 지어진 집을 짓고 싶어졌다.

그렇게 해서 나의 집을 지었다. 

골조부터 내부까지 나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가 설계하고 내가 짓는 집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집 앞 화단에 그동안 내가 공들여 가꾸었던 나무들과 화초를 심었다.

완벽했다. 

그런 집을 이젠 팔아야 한다. 애정은 속박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사랑하는 동물 때문에, 사랑하는 그 무엇 때문에 그곳을 떠날 수 없게 된다.

자유를 원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끊임없이 무언가로부터 속박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가장 큰 속박은 아이와 집, 그리고 화초였다.

아이는 이제 커서 나의 품을 떠났고, 집과 화초만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들은 참으로 오랫동안 나의 곁에서 편안함과 위로를 줬다. 

이제 그것들을 떠나보내야만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있다.  

함께한 시간과 쏟은 애정의 시간이 길수록 우린 떠나보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것들의 손은 내가 놔야한다.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애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이동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헤어질 수 있다.    


D-3 아들    


아들과 통화했다.

다행히 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출장 중이다.

키우는 내내 고민했었다. 내가 이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내 걱정과 다르게 아이는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만큼 잘 컸고 나름의 위치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

여전히 벗이고 형 같은 나에게 아들은 시원스럽게 얘기한다.

전화기 너머 아들의 목소리는 밝다.

“불행하다 느껴지시면 언제든지 돌아오셔도 되요, 저는 늘 엄마가 그리울 거예요”

고마웠다.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어떡하지? 걱정도 했다. 하지만 의외의 반응에 그의 고민이 느껴졌다.

나 또한 “하루에 한 번씩 서로의 안부를 묻자. 너의 선택이 너를 위한 것이 되길 바래”

오랜 시간동안 나의 벗으로 아들로 있어준 아들 덕에 참 행복했다.

그런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이젠 그 또한 내려놓아야 한다. 

잘 다녀오시라는 말을 하는 아들의 말끝이 떨린다.

나 또한 티내지 않으려 했지만 잘 지내라는 말끝이 떨리고 말았다.     


D-2 가구    


가구를 내기에 아침볕이 좋은 날이다.

7시쯤 동네 남자들 몇몇이 와서 소파, 침대, 옷장, 수납장, 식탁, 화장대 등 책장들을 밖으로 내고 있다.

30분도 안되어서 그것들은 마당에 내어졌다.

집이 텅빈듯했다.

작게만 느껴졌던 공간은 이미 나에게 너무 큰 공간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그것들은 그 공간 안에서 내가 외롭지 않게 벗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크지 않지만 40대 목수 일을 하면서 내가 공들여 만든 작품 같은 가구들을 보내는 일은 오랜 벗을 떠나보내는 느낌 못지않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곳에 있으면 돌아와야할 것같은 생각이 들어 어쩔 수 없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시계만 보며 살고 싶지 않았다. 쇼핑과 영화, 수다 외 어떤 것도  할 것이 없는,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삶을 더 이상 지속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 두 무릎이 성하고, 허리가 꼿꼿할 때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 풍경들, 삶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기에 머물러 나를 기다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12시가 되기도 전. 그것들은 벌써 각자 주인을 만나 내 보금자리를 떠났다.

텅 빈 집안에 들어오자 나는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별이라 그런가? 지나온 삶과 함께했던 그것들을 떠나보내고 나니 허탈함에 참았던 눈물이 쉬지않고 흘렀다.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없으면 그곳의 어떤 것도 무의미해지는. 

하지만 우린 얼마나 그것들을 위해 살아왔는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와 미련을 안고 사는 것 같다.

휩쓸리지 않고 제대로 살아볼 걸~ 하는.    


D-1 은경이    


이른 아침 초인종 벨소리에 잠이 깼다.

아침장이 열리려면 아직 2시간이나 남았는데 이른 시간 누구일까 문을 열었다.

작은 은갱이다.

옆에는 작은 가방이 있다.

무슨 가방이냐고 물으니 함께 갈려고 왔다고 했다.

은경이와 나는 같은 꿈을 꾸었다. 그동안 여건이 되지 못해 하지 못했을 뿐.

나의 계획을 듣고 은경이도 나름 고민을 했다고 했다. 무섭기도 걱정도 되었다고. 

하지만 남편이 떠나고 난 후 은경이는 한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외롭고 그리운 마음에 사람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그런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언니와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젠 책임질 그 무엇도 없다고, 이젠 두렵지 않다고 했다.

어쩜 나 또한 그녀가 있으면 든든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참으로 많은 삶들을 포기하며 살았다.

아이는 커서 자기의 삶에 바쁘고, 남편 또한 곁에 없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은 무엇일까?

습관처럼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 것인지, 허락된 남은 시간동안 나를 위한 삶을 계획하고 살아갈지는 오직 나만이 선택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것들이 두려워진다. 새로운 것들이, 모르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두렵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더 많은 기회들을 놓치게 되고 익숙한 것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나의 도전은 모험이다. 어쩌면 죽음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문 앞에 작은 가방과 함께 서있는 은경이를 나는 꼭 안아주었다.    


D-DAY    


드디어 내가 계획한 그날이 왔다.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것.

자동차로 국토 여행하기. 40대 후반에는 세계여행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꼭 세계를 여행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살아온 이 땅의 곳곳을 누비며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과 인사하고 얘기하며 삶을 마감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가능할까? 도 생각했지만 국민연금의 작은 돈과 40대 후반부터 저축해놓은 돈, 그리고 집값이면 가능할거라 생각했다. 아니 가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40대 후반에 가끔 얘기를 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기 하나 들고 직립보행하며 여행을 다니는 것이 나의 삶의 목표라고 말이다. 

80대가 중반이 되어서야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곳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동안의 나의 삶을 나눌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살았던 이곳이, 내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살만한 것이었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나의 벗 영실이가 죽었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남편을 위해 평생을 여행한번 가지 못하고 뒷바라지만 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매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어디로 여행을 가냐며 물었는데……. 함께 가고 싶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해 늘 안타까워했고 결국 그녀는 그토록 원한 벗과의 여행 한번 가지 못하고 떠났다. 


그래서 일까? 5년 넘게 장롱 속에 넣어둔 사진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루하루를 익숙하게 살아내느라 정작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잊고 살았다. 그것이 편했고 어려운 것에 대한 도전은 이 나이에 무의미하거나 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늘 같은 장소, 익숙한 음식들, 매번 비슷하게 나오는 TV프로그램들, 그리고 사람들.

그냥 사는 것이었다. 가끔은 벗과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다니거나 찻집을 가는 것이 다였다.

그런 나에게 벗은 잊었던 꿈을 일깨워주고 떠났다. 

난 시작했다. 삶의 짐을 정리하는 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즐거운 방식으로 정리되었고, 덕분에 많은 동네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이렇게 오픈해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미 여행을 시작했다. 

물건을 사기 위해, 나누기 위해 찾아온 동네사람들과 벗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행복하고 즐거운 그들의 표정을 담을 수 있어서 나도 근래 며칠간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나의 여행의 시작과 끝에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과의 만남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계획된 여행이다.

풍경 좋은 곳을 관광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은경이와 나는 계획대로 오늘 출발한다. 

그동안 나와 함께 했던 포르테에 짐을 싣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은경이가 외친다. “출발” 
매거진의 이전글 언니가 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