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것과 쓰는 것.
그 어디 즈음의 언저리에서, 나는 무엇을 더 중점적으로 해야 할 지에 대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활자는 화면 안에도 있고, 화면 밖에도 있다.
화면의 활자는 날 것 그대로, 정제되지 않았다.
바닷가에서 잡아 올리는 싱싱한 생선,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화면 밖에서 만나는 활자는 구미에 맞게 정찬으로 차려져 나에게 올라온다.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지만, 식사 후 곤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세상의 활자를 구별해 읽기도 어렵거니와
세상 안에서 써야 하는 나의 글과
분리된 것만 같은 자아로 쓰는 세상 밖의 나의 글도
구별하기 어렵기는 매 한 가지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중이다.
이 세상에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은 혼란.
두 개의 이름이 있었던 로맹 가리를 상상해 본다.
여러 개의 이름으로 살았던 페르난두 페소아를 생각해 본다.
그 대단했던 작가들의 이름을 외는 내 비루한 입을 생각한다.
빛나는 글과 통찰을 지면에 옮겼던 그 치열함을 내가 알아챌 수 있겠냐마는,
때로 무엇이 진정 나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울 때면,
진정으로 그들이 작가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고마울 때가 많다.
덧. 설악산에 대한 글은, 말랑하기만 하다. 글은 내 생각의 일부도 담지 못할지도 모른다. 역시나 나의 재주는 일천하다. 새삼 한나 아렌트의 말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철학자는 자신의 생각을 모두 지면에 담지 못한다고. 철학자도 글을 쓰는 그 누구도 그럴까 싶은 스스로에 대한 위로의 말을 스스로에게 건넨다.
덧 2. 그저, 이렇게 방황하는 것은, (작가의 이름도 잘 외워지지 않는)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작가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책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단하다, 강렬하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생각보다 오래가는 허무와 고통, 이다. 주말 동안 쉽게 읽히는(읽히고도 황당한) 대작을 만나, 이렇게 고생 중인지도 모른다. 모르고 살았다면 좋았을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만. 알게 되어 감사하게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덧 3. 그래서 말인데, 저 작가의 글에 대한 생각의 정리가 끝나야, 설악산의 글도 쓸 수 있을까. 설악산은 겪은 일이고, 책은 그래봐야 간접경험인데. 주제도 전혀 다른 두 가지 일들이 뭐 이렇게 복잡다단하게 얽혀 나를 감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혼자서 끄적이고 있는 소설. 겨우 초고를 마무리 지어놓았지만 수정할 부분은 차고 넘치는데 두 주가 넘게 한 글자도 검토하지 못하고 있다. 열댓 장의 성의 없는 글뭉치가 과제처럼 서재에 처박혀있다. 그렇지만 가장 시급한 일은 집안 화장실 청소와 분리수거,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