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글벗들을 만났다. 달에 한 번씩 온라인으로 하는 창작 합평에는 꾸준히 참가했지만 얼굴을 본 건 3년만이었다. 그동안 등단한 선배는 두 번째 책을 엔솔로지로 출간했고, 다른 선생님은 10월에 첫 책 출간을 앞두고 잔뜩 상기되어 계셨다. 오랜만의 모임이라 처음 창작수업에서 우리를 이끌었던 작가님도 와 주셨다. 모임 전 인원을 물어보시고는 4월에 발매된 신간을 가지고 오셔서 2차로 간 후미진 호프집의 테이블 위에서 사인을 해 주셨다. 정성껏.
잘 지내세요? 라는 말에 어디까지 거짓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술자리는 올해의 남은 시간동안 함께할 장편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말을 몰래 엿듣는 심정으로 덤덤히 일정들을 들었다. 그런 일들이 더 이상 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전공 장르를 바꿔 처음 출판사의 창작수업을 들었던 5년 전, 나는 열의와 설렘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새로운 장르인데 맞춤 옷을 입은 것처럼 가뿐하고 즐거웠다. 공부한 지 6개월만에 주요 잡지사 최종심에 두 번 올랐고, 이듬해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다. 다들 멀지 않았다 했다. 주요 문학상 발표가 난 다음이면 모두 내게 좋은 소식이 없는지 종종 연락을 주시기도 했다. 이제 그런 연락은 받지 않는다. 아이들 키우느라 바쁘죠? 아이들 얼마나 컸나요? 그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 아이들의 안부를 대신해서 묻는다.
반가운 사람들과 어쩐지 어울리지 못하고 구석에 찌그러져 술만 먹고 있는 내게 선배는 좀 피곤하냐고 했다. 아니라고, 친정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신경쓰여 그렇다고 했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아마 알 테지만. 작가님이 멀리 앉은 내게 술잔을 일부러 부딪히시며 잘 쓰고 있냐고 했다. 네, 뭐....... 나는 늙은 개처럼 웃었다. 초점도 힘도 없이. 나도 모르겠는 내 가능성을 믿어주시는 분께 늘 머쓱하고 민망했다.
"난 애들 그만할 때, 책 한 권 못 읽었어요. 샘 대단한 거야."
별 말도 아니었는데, 어떤 선생님이 하신 말씀에 나는 포크를 받쳐 두었던 냅킨을 황급히 모아쥐고 한참 울었다.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지를 주듯 휴지를 접어 내게 건넸다. 아, 나는 왜 이럴까. 지금 나는 얼마나 꼴사납고 우스울까. 아이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해 분하고 서러운 엄마처럼 보일까? 질투와 부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애처럼 보일까? 나는 그 순간에도 그런 걱정뿐이었다.
가늘고 길게 버티자. 그게 그날 우리 대화의 주요 주제였다. 몇해 전만 해도 같이 공부한 누군가의 출간 소식이나 등단 소식이 설레고 기뻤다. 그들이 쏘아올리는 화려한 불꽃놀이를 같이 구경하며 그 풍경이 곧 내 것이 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점점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긴 마라톤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건 체력도, 달리기 능력도, 좋은 날씨나 러닝화도 아니다. 제일 중요한 건 '뛰고 싶다는 마음'이다. 지금 내게 '쓰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을까.
서울을 떠나 집이 있는 도시로 돌아왔다. 그날 밤의 일들은 꿈을 꾼 것처럼 희미해진다. 프로젝트 과제로 받은 작품을 주말까지 써서 합평 게시판에 올려야 한다. 밍기적밍기적 운동을 하고, 떠밀리듯 카페로 들어와 파일을 연다. 제목과 이름만 있는 파일 속에서 커서가 깜빡이고 있다. 심장박동처럼, 일정하고 지겹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