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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TO May 30. 2023

언젠가의 지난밤.

'얇은 여행'


지난밤에는 경주를 다녀왔다. 먼저 여행으로 가 있던 이에게 초대를 받았다. 슬쩍 떠보는 권유에 더 가까웠다. 무슨 바람이 내 속을 휘저었는지. 나는 카페를 마감하고 경주로 떠났다. 시간은 이미 8시였다. 기차표를 예매하는 내내 나는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경주로 여행을 떠난 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경주>라는 영화를 봤다. 예전에도 재미있게 본 영화. 그래서 떠나고 싶어 졌을까? 그 영화에 흐르던 음악처럼, 묘한 기분이 경주에는 흐를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을까? 아니면 그저 바람이 쐬고 싶었을까?
경주에 도착해서는 내내 걸었다. 이미 밤이 깊어 들어가 볼 수 있는 유적지는 하나도 없었다. 아쉽지는 않았다. 텅 빈 거리. 밤의 경주는 공기가, 온도가, 떠도는 마음들이 전부 유적이었다. 
 지난밤. 나는 경주를 다녀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경주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 매번 상상하고 매번 후회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 확연한 후회를 물리치기 위해 경주에 갔다. 물론 이것은 뒤에 찾아낸 이유다. 하지만 목적을 이룬 뒤에 생기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그 빈 골목의 공기를 기억한다. 불쑥불쑥 올라있는, 그 옛날 높았던 누군가의 무덤들을 기억한다. 영화에서 본 찻집. 여기에도 있는 멀티플렉스. 우르르 몰려다니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들을 피해 걸은 더 깊은 골목. 너무나 당연히 우왕좌왕해야 했던 그 시간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이곳이어서 가능했던 것들. 내가 떠나왔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난처함. 자책을 가장한 만족. 서로를 향한 칭찬. 그리고 밤. 밀도 깊은 그곳의 밤.
 경주를 다녀왔다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무얼 봤느냐고 물으면 그냥 경주를 봤다고 말한다.
그 언젠가의 지난밤. 나는 카페를 마감하고 경주에 다녀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첫 기차를 타고 돌아와 카페를 오픈했다. 좋은 하루였다. 가장 충분한 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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