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는 늘 빚과 함께였다

- '빚'이란 생소한 단어가 결혼 기간 내내 따라다녔다

by 세니카

결혼 생활의 대부분은 '빚'이라는 단어와 함께였습니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지금까지 줄곧 주식 투자에 몰두해 왔습니다.

정확한 시점은 흐릿하지만, 7~8년 전쯤부터는 미국 선물옵션으로 방향을 바꾼 듯 보였습니다.

방식은 달라졌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수익은커녕 손실만 쌓였고, 그 끝에는 언제나 빚이 남았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합니다.

그런데 그는 30년 넘게 투자를 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수익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늘 빚만 안고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손해만 보며 살 수 있었는지

그 자체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는 걱정을 하는 내게 늘 '조만간 좋아질 거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마치 마법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안에서는 희망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정말 다를지도 몰라."

나는 그의 말을 오롯이 믿었습니다.

아니, 믿고 싶었습니다.

그 믿음은 어쩌면 나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하 자기 암시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만간'은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투자 실패, 빚, 침묵, 눈치, 그리고 내 희생이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


나는 생활이 힘들 때면 신용대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용이 한계에 도달하면

제게 '현금 서비스'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정중한 부탁이 아니라, 거절하면

금세 분위기가 바뀌고, 말투가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런 그 앞에서

나는 마치 숨을 참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그의 눈치를 보고,

그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조용히 넘어가려 애썼습니다.


두 번, 내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뻔했습니다.

또다시 주식 투자를 하려는 것이었지요.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현금서비스를 받아 건넸습니다.

그의 화를 피하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어쩌면 나 역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번엔 정말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참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도,

내 감정과 판단을 접어두고

그의 말과 기세에 끌려 다녔습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채,

또다시 그렇게 실패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때의 나는

'왜 나는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지?'라는

그 질문조차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이라도 들었다면,

적어도 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을 진정으로 위했다면

내 말을 단 한 번만이라도 깊이 생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의 주식투자 습관이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중독이었다는 사실을요.

그는 손해를 보면서도 멈추지 못했고,

오히려 더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이제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지배한 것은 돈도 아니고, 투자도 아니었습니다.

빠져나오지 못한 중독과 무책임함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언젠가 좋아지겠지'라는 믿음 하나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아니, 그의 마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반성도, 변화도 없이 되풀이되는 그의 삶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기대할 것도, 기다릴 이유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내 안의 침묵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나는 이 사람의 실패까지 감당하며 살아갈 이유는 없다고.

그렇게 내 안의 생각이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말합니다.

"조만간 좋아질 거야."

그 말이 이제는 너무 익숙하고, 너무 지겹습니다.

그가 다시 빚을 질까 봐 두려운 게 아닙니다.

그 말에 내가 또다시 속아주게 될까 봐, 그게 더 무섭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어야 하는 건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그에게 허용했던 내 삶의 경계입니다.


나는 이제 그 경계를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그가 또다시 빚을 진다고 해도,

그건 더 이상 내 몫이 아닙니다.

나는 그의 인생에 보증인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아주 늦었지만,

이제는 빚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심만큼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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