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열차에 타 있었다.
왜 탔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타야 하는 것이지만 굳이 지금 타지 않아도 됐는데. 벌써 타지 않아도 됐는데. 아직 팔리지 않은 표가 많이 남아있었는데 무엇에 이끌린 듯 표를 샀다. 늦게 사 색이 바랜 표는 나름의 기억을 담은 표일 텐데 그 기억에 대한 예의를 차릴 여유도 없이 그냥 빳빳한 표를 손에 들었다. 빳빳함이 주는 느낌이 결국 누구의 인상에 남을지 모른 채로.
열차의 창밖으로 남아있는 너무 많은 것이 보인다. 함께 플랫폼에 서 있을 땐 몰랐던 사람들, 열차에 타게 될 줄 모르고 생각 없이 지나쳐온 계단은 이제와 보니 표정이 없다. 그들의 표정은 이미 내가 욕심껏 갈무리해와 빳빳한 표 뒤에 꽁꽁 숨겨두었다. 이미 기억 속에는 과거 너와 나의 표정들이 한가득 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 계단에 분필로 표정을 그리지 않을 테다.
아쉬움은 지나온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탄 열차가 지나치게 될 새로운 역에 있다. 그 역에 내 열차는 서지 않을 것이니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아쉽다. 좀 더 어렸을 때는 모든 역에 정차하는 완행열차를 탈 수 있을 줄 알았다. 새로운 표정을 지으며 역마다 꼼꼼하게 살피고 기억을 문지르다가 나를 기다려주는 열차에 다시 오르는 꿈을 꿨다. 느림의 미학이란 거창한 말이나 반짝이는 철이 없어도 되었다.
지금은 지금을 즐기라는 말 때문에 아무데서나 내릴 수 없다. 모든 역은 나름의 표정이 있을 텐데 내려서 살필 배짱이 없어 열차 안에서 창에 코를 박고 역의 계단 끄트머리만 살핀다. 배짱은 모르는 겨울을 걱정하느라 노래도 부르지 않고 더 나을 것 같은 다음 역에 내릴 다짐을 한다. 소중하다고 의미를 부여한 빳빳한 지금을 고이 손 안에 싸매고 있다 보니 부드럽지 못한 지금이 손바닥을 찔러온다. 얄미워. 주먹을 꽉 쥘 용기는 없지만 그래도 살짝 힘을 주어 얄미움을 누그러뜨렸다. 갑작스레 거창한 지금이 사라지고 귀퉁이가 구부러진 표가 남았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24라는 숫자가 새겨진, 그냥 열차를 타기 위해 필요한 표.
다음 역에 내려야지. 귀퉁이가 구부러진 표를 역무원에게 내민 다음에 역무원 표정을 살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