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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실생활자 Oct 05. 2015

#12 색연필

ⓒkimeungyoung



지금이야 해외여행이 흔하디 흔한 시대지만 신혼여행도 부산으로 다녀오신 엄마는 비행기를 한 번도 타 보지 않으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또 처지가 다르시다. 젊은 시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몇 년 동안 건설일을 하시며 한국과 사우디를 왔다 갔다 하셨으니까. 여하튼 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철도 좀 들고 여유도 좀 있을 무렵 부모님께 제주도 구경을 시켜 드리려 여행을 계획했다. 엄마는 딸내미 덕에 비행기를 탄다며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타이틀은 효도여행이었으나 지금 생각하니 그 목표를 잘 달성한 것 같지는 않다. 안타깝게도. 늘상 친구와 함께 혹은 혼자서 편하게 돌아다니다가 부모님을 모시고 나선 여행은 처음이라 서툴렀다고나 할까. 평소 계획 없이 막무가내로 다니는 것에 익숙했는데, 체력이 좋지 않은 엄마를 감안해 매번 가장 효율적이고 가능한 동선으로 일정을 짜고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메뉴와 장소를 미리미리 물색하려니 서툴고 어설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서는 참 즐거워해 주셨다. 특히 엄마는 제주도의 멋진 풍광을 본다는 신선한 경험에 정말이지 소녀처럼 웃으며 좋아해주셨고, 평소라면 절대 볼 수 없었던 아버지와의 포옹씬도 사진 촬영을 하며 흔쾌히 연출해주셨다. 드디어 2박 3일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길, 비행시간을 기다리며 공항 면세점에서 이것저것 돌아보는 중이었다.


여행에 함께하지 못했던 남동생에게 선물할 손목시계도 하나 사고, 아버지 담배, 엄마 화장품도 기념이라며 하나씩 샀다. 그리고... 나는 프리즈마prisma 24색 색연필 앞에 서 있었다. 컬러풀한 그림이 그려진 독특한 케이스도 마음에 들었고, 들어 있는 색연필 색상도 마음에 들었다. 살까? 하지만 평소에 그림을 그리던 것도 아니고, 24색 색연필을 가지게 된들 내가 뭘 그리겠나 싶어서 망설이던 참이었다. 그때 엄마가 쓱- 옆으로 오셨다.


"뭐?"

"흐흣. 색연필."

"하고 싶어? 엄마가 사주까?"

"아니~. 싼 것도 아니고. 이걸 사도... 내가 쓸까?"

"엄마가 기념으로 사주께."


엄마가 웃으시며 색연필을 사주셨다. 내 예상대로 그 프리즈마 색연필은 아주 오랫동안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기만 했다. 애초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뭘 그려볼까 싶어 종이를 펼쳐보아도 막막하기만 했으니까. 그사이 그림은 그리지 않고 색연필만 한 통 더 늘었다. 파버카스텔 24색 수채색연필. 이건 색연필로 그리고 물 묻은 붓으로 덧칠하면 수채화처럼 되는 마법의 색연필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게 신기해 이렇게 저렇게 막 선을 긋곤 그 위에 물을 덧칠했다. 그러고 나서도 몇 년을 두 색연필 모두 거의 그대로인 길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작년 연말쯤? 우연찮게 다시 색연필을 꺼냈고 이번엔 좀 서툴지만 뭔가를 그리고 있다. 그렇게 슬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지금은 이렇게 내가 그린 그림을 내놓고 이야기도 한다. 용감하게도, 하핫. 이젠 취미가 그림 그리기라고 해도 될 만큼은 자주 그리게 됐다. 여전히 보고 그리는 수준의 초보자이지만.   


힐끗힐끗. 오늘은 프리즈마 색연필 통을 꺼내 놓고 그렸다. 거창한 작품이라도 그릴 듯 파버카스텔 색연필과 프리즈마 색연필 모두 꺼내어 이것저것 써가며. 그 옛날 엄마가 사준 색연필 세트를 그리다 보니 예전 부모님을 모시고 갔던 제주도 여행과 엄마 생각이 절로 새록새록 난다. 다음에 집에 갈 땐 그림 수첩을 챙겨 가서 엄마에게 보여 줄까 싶다. 예전에 엄마가 사주신 색연필로 여태 이러고 잘 놀고 있다며. ㅎㅎㅎ




아직은 햇살도 부드럽고 대기는 선선하다. 적당한 아침 식사 후 물뿌리개를 들었다. 느긋하게 정원의 꽃나무 화분들에 물을 준다. 신선한 물을 한껏 머금은 붉디 붉은 꽃들은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초록의 화초 잎은 넘치는 생기로 반짝인다. 들릴 듯 말 듯 절로 새어나오는 그녀의 낮은 허밍. 싱그러운 아침이다.  


p.s 엄마는 이제 건강이 더 안 좋아지셔서 그 좋아하시는 꽃나무도 마음대로 못 사신다. 관리도 못 할거 괜히 죽이기나 할거라시며. 하삼의 그림처럼... 엄마가 꽃나무 가득한 마당에서 물도 주고 마른 잎도 떼주며 싱그럽고 평온한 한때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 선물처럼.


Frederick Childe Hassam, After Breakfast,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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