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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실생활자 김편집 Oct 03. 2021

#14 시계

ⓒkimeungyoung


6~7년쯤 전의 일이다. 회사도 그만뒀고 딱히 앞날에 대한 대책도 없던 터라 암울해도 엄청 암울했어야 할 시기가 있었다. 다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은 상처 받았고 가진 것 없이 빈손이 되어 있었으니 마음이 바닥을 치고 땅을 파고 들어갔어야 정상일 그런 때였다. 그런데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부터 난다. 꽤나 죽이 맞던 나의 어린 친구와 뭐가 그리 웃기고 즐거웠는지 실업자 처지인 둘이서 거의 매일 만났는데 우울하다거나 걱정에 치인다거나 했던 게 아니라 매일 신났고 매일 재미있었고 매일 이런저런 일을 도모했다. 치밀한 계획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마냥 즐거웠나 모르겠다. 천성이 오늘만 산다, 하는 천성도 아닌데.


친구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짧은 글을 써서 원고를 하나 완성하는 과정에서도 웃었고, 별별 휘황한 앞날을 이야기하면서도 웃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대책 없었다 싶지만 한순간 너덜너덜 거지 같아져 버린 마음이 초라하지 않고 심지어 환했던 건 웃길 때 함께 웃고, 화날 때 함께 화낼 수 있는 동지가 있었던 덕분이다.


그 시기는 한 2~3개월로 생각보다 빨리(?) 막을 내렸는데, 나도 다시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했고 그 친구도 막 직장을 구했을 때인 것 같다. 그 친구가 선물이라며 시계를 건넸는데 당시 우리들 처지에선 좀 과한 선물인 것 같아 놀라기도 했지만 너무 마음에 들어서 속없이 좋기도 했다. 짙은 카키색 가죽 스트랩에 화이트와 골드가 조합된 다이얼이 깔끔한 다니엘 웰링턴 시계였다.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나는 이 시계가 애틋하다. 뭐랄까. 깜깜하고 무서울 뻔한 터널을 손잡고 함께 지나온 동지가 금방 빠져나온 터널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란 듯 툭툭 남은 어둠을 털어내 주며 달아준 훈장 같았다. 반짝반짝하는 것이 정말 훈장 같았다.


그 시절이 재미있다고 기억하는 우리가 서로 대견하군, 하고 느껴지는 건 상황에 호들갑스럽지 않았고, 매몰되지 않았고, 덤덤히 스스로를 지켰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서 함께 터널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으면서 그 시간을 건너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어둠이 불쾌하지 않았다거나 질척이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니 절대 또다시 만나고 싶진 않지만 그런 터널이 앞으로 살면서 또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럼 또 그때처럼 무언가에, 누군가에, 스스로에, 의지해 덤덤히 어둠을 헤치고 계속 걸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또 세월이 흘러 그 친구와는 물리적 거리가 좀 멀어졌다. 하지만 서로 있는 곳은 멀어도 멀리 있으면 멀리 있는 대로 요즘도 우리는 매번 함께 낄낄댄다. 여전히 같은 타이밍에 '빵' 터질 수 있고 여전히 같은 타이밍에 '대박!'을 외칠 수 있는 그 친구는 멀리 있어도 여전히 여전하시다. 한 번씩 손목의 시계를 보며 웃는다. 이제는 오래되어서 카키색이 아니라 짙은 녹갈색처럼 보이는 시곗줄을 보면 그때의 어두웠던 터널이 생각나고, 골드빛이 반짝반짝하는 다이얼을 보면 그럼에도 반짝이는 시간으로 지켜낸 그 시간들 같아 마음이 애틋해진다. 그리고 참, 서로 대견했다 싶은 그 시간들을 떠올리면 앞으로 또 어떤 터널을 만나더라도 '나 이런 훈장도 받은 사람인데...' 하며 그때처럼 덤덤히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어떤 순간에도 내가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은 어떤 순간도 끝난 순간은 아니며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중이란 걸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그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어떤 모습의 나이고 싶은가, 어떤 나로 남고 싶은가, 하는 생각을 잊지 않으면 그런 것도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 같다.  





어둠에 휩싸인 밤의 숲 위로 하늘은 무심히 빛난다. 불안한 여정으로 정처 없는 마음을 다독이며 모닥불을 피우고 지친 몸을 움직여 하룻밤 쉴 곳을 마련한다. 밤하늘을 뚫고 시리게 빛나는 별빛도, 마레(mare)를 선명히 드러낸 달빛도 정묘히 빛나는, 다만 고요하고 고요한 밤. 온통 침묵에 휩싸인 어둠 속에서 절로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피난의 밤.


아담 엘스하이머, <이집트로의 피신> Die Flucht nach Ägypten(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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