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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실생활자 김편집 Nov 17. 2024

열두 달, 계절을 먹고 깨닫고 쓰다

미즈카미 쓰토무 《흙을 먹는 나날》

친한 후배가 아파트 근처 텃밭에서 어머니가 직접 기른 거라며 가지와 부추를 나누어 주었다. 많지도 않은 두어 주먹 정도의 부추가 다정하게 신문지에 싸여 왔는데 뿌리에 흙이 묻어 있는 부추를 보며 참 낯설다, 싶었다. 흙 묻은 채소를 본 지가 대체 얼마 만인가 싶어서. 생각해 보면 향긋한 흙내와 함께 풍요롭던 우리의 먹는 시간은 마트 포장지에 싸여 말끔해지고 제철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면서 오히려 소홀해지고 황폐해졌다.


후배 어머니가 직접 기른 부추를 다듬었다


"흙을 먹는다는 것은 제철을 먹는 것"


미즈카미 쓰토무의《흙을 먹는 나날》 추천사에서 박찬일 쉐프는 "일본인들은 이 책이 출간되고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채식을 하고 그 경험이 쌓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돈가스와 라멘, 햄버거, 야키니쿠가 그들의 표준음식이 되어버린 현실을 자각하며 충격 받은 것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만 할 수 있을까. 우리의 현실 또한 밀키트니, 간편식이니 하며 온갖 패스트푸드, 냉동음식으로 식탁이 점령당한 지 오래다. 추석 차례상, 설 차례상을 장만할 때도 분명 과일, 고기, 버섯, 맛살, 파, 조기, 알배추 등 식재료의 마트 포장지부터 뜯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이가 늘어나고 그 다양한 고민 속에 좋은 먹거리와 자기 돌봄, 건강한 풍요로움을 모색하는 이들 또한 늘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흙을 먹는 나날》은 저자가 삶의 경험에서 길어 온 정진 요리(불교의 계율에 따른 전통적인 요리)의 의미, 먹거리에 관한 깊은 철학과 함께 흙에서 난 것을 먹고, 먹은 것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을 차분히 음미해 보는 시간을 선사해 줄 것 같다. 


직접 요리하고 재료를 준비하며 천천히 음식을 만드는 저자의 흙을 먹는 나날을 따라가다 보면 요즘 세상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여유와 만족감으로 속이 그득 찬다.


한겨울의 저장고에서 토란 한 알을 쓰다듬으며 꺼내는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바깥은 영하의 혹한이다. 윙윙 바람 불고 난로 연기마저 얼어붙어 하늘에서 부서지는, 한시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추위다. 그럴 때 손에 든 토란이 고맙다. 빨리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이 왔으면 좋겠다. 나는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밭을 바라보다 칼로 조심스레 토란 껍질을 삭삭 긁어내듯이 벗긴다. - 본문 25~26쪽



맛, 기억의 서랍을 열다


《흙을 먹는 나날》의 저자는 어린 시절 선종 사원의 부엌에서 스님을 모시며 배웠던 음식을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자신의 작업실이 있는 가루이자와의 산장에서 여러 추억과 함께 떠올린다. 그때의 가르침 대로 재연하기도 하고, 한 발 나아가 좀 더 나은 방식으로 새로이 궁리해 본 것을 《흙을 먹는 나날》을 통해 펼쳐놓는다.


그 속에는 일 년 열두 달, 각 달에서 다뤄지는 재료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고, 계절의 흙내를 고스란히 품은 토란, 매실, 버섯, 푸성귀들을 어떻게 "한 번 더 궁리해 빛나는 맛"이 되도록 하는지 저자의 귀한 궁리가 담겨 있기도 하다.


숯불에 구운 쇠귀나물 덩이줄기와 토란을 먹고, 생강과 양하를 넣어서 뭉친 주먹밥을 먹고, 매실을 절이고, 호두와 땅콩을 함께 넣어 두부를 만들고, 산열매로 담금주를 만들며 이어지는 풍성한 이야기는 그의 깊고 그윽한 문장과 함께 읽는 맛을 더하는 성찬이 된다.


재료에 관한 해박한 지식, 맛있게 먹는 방법, 일본 정진 요리 발전에 초석이 된 《전좌교훈》의 귀한 글들까지 함께 맛볼 수 있다.


이런 일들도 떠올리며 나는 죽순에 달려들어 먹는다. 개나 고양이는 이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죽순을 먹지 않지만 인간은 신기한 동물이어서 입에 넣는 죽순의 맛 외에도, 뜻하지 않게 지난날을 담은 서랍이 열리면서 그 기억을 동시에 음미한다. 단순히 흙에서 난 것을 먹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입에 넣는 음식이 흙에서 난 이상 마음 깊이 지난날을 음미하면 땅과의 인연이 맛을 뒤덮는다. 이것도 참맛의 하나일까.
- 본문 90~91쪽


그렇다. 우리 인간은 개나 고양이와 달리 문득 느낀 맛 하나로 기억의 서랍을 열고 그 기억을 음미한다. 가령, 저자는 산초 열매를 절구에 곱게 갈아 백된장과 섞고, 거기에 색을 더하려 부드러운 시금치 잎을 넣다가 산초조림 국물과 몇 개의 열매를 삼시 세끼의 낙으로 삼았던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열린 기억의 서랍을 들추다 보면 "쌉쌀하고 짭짤하게 또한 달콤하게" 혀를 자극하는 산초의 맛처럼 갖가지 그리운 맛과 추억이 덩달아 튀어나온다.



진정한 맛을 안다는 건 사는 맛을 아는 것


하루에 세 번, 혹은 두 번은 먹어야 하는 귀찮은 우리의 행사. 한 끼 먹거리를 준비하는 시간은 사람의 모든 생이 걸린 일대사이다. 그 중대한 일을 위해 밭에 의견을 물어 상차림을 하는 것이 제철을 먹는 일이며 곧 흙을 먹는 일이라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맛을 안다는 것은 사는 맛을 아는 것이 아닐까. 신문지를 펼치고 부추를 다듬으며 식재료가 가진 흙의 기억을 궁리해 풀어내는 것이 요리가 아닐까, 요리란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을 따뜻하게 하는 일이구나... 고개를 주억이며 저자의 생각을 따라간다. 결국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정하는 이 모든 일이 우리 본연의 삶의 방식을 정하는 일일 것이다.


출간이벤트로 열린 책담화에 제공된 계절식 한끼.
책의 삽화를 그린 작가님이 운영하는 '단정'에서 출간 이벤트 책담화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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