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남편의 선택_ “여보 미안하지만 나는 퇴사할거야.”
불안을 잠재우는 봄, 나는 꽃이 피어 행복했다.불안을 잠재우는 봄, 나는 꽃이 피어 행복했다.
불안을 잠재우는 봄, 나는 꽃이 피어 행복했다.
올봄은 유난히 더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에는 가시가 있기 마련, 3월 시작을 앞두고 저 멀리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 소식이 들려왔고,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천정부지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마음속 작은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먹고 더 크게 자랐다. 기나긴 전염병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커져버린 불안이 평정심보다 앞서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불안 속에도 우리는 개미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일상을 살았다.
나는 출산과 휴직, 복직을 통틀어 8년 동안 적을 두었던 학교를 떠나 새로운 전임지로 왔다. 인근의 여자중학교. 나의 모교인 여고 뒤에 위치한 이 학교는 출장이나 수업 참관으로도 한 번 와보지 않은 미지의 학교였다. 환경도 낯설뿐더러 같은 법령과 지침 아래서 학교는 저마다의 시스템과 체계를 갖고 작동하고 있어 적응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2년 만에 담임을 하는 것이라 설레고 기대되는 부분도 있었으나 덜컹 학년 부장이라는 직함이 따라붙어 계속 들뜨려는 마음에 추를 달아놓은 듯 무겁게 가라앉고는 했다. 학교 교육 목표에 따른 학년별 교육 비전을 세우고,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활동을 새 학년 맞이를 위해 모인 2월의 모임 첫날, 하라고 하셨다. 전문적 학습 공동체의 학년별 운영에 따른 주체가 나라니, 나는 아직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누가 어느 과목, 어떤 선생님 인지도 헷갈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학교가 너무 예뻤다. 교문 앞에 큰 벚나무에 작은 구름 같은 꽃들이 피어났고, 운동장 건너편에는 5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아래에서 편안히 쉴 수 있는 의자들도 놓여 있었다. 중앙 현관 입구에는 화분에 심긴 어여쁜 꽃들이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고 2층 창가에는 앙증맞은 다육이들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적막한 교무실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어김없이 새소리가 들려왔다. 동료 선생님들도 좋으셨고 아이들은 크게 나무랄 데 없이 저 알아서 스스로 잘했다. 나만 잘하면 되었다.
개학 전부터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내가 너희의 담임이라며 학급 대화창을 개설하고 여러 안내사항을 전달했다. 그중 한 학생이 개학도 전에 확진된 것을 시작으로 3월부터 4월까지 코로나 확진은 도돌이표 노래처럼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도돌이표 노래 같은 나의 일과도 이어졌다. 매일 아침 숙제처럼 스스로 자가진단 앱에 자신의 건강상태를 체크할 것, 본인 및 동거인의 의심 증상이 있다면 선생님께 알릴 것, 학급 내 확진자나 의심증상자를 파악하여 엑셀 서식에 관련 내용을 입력하고 보건 담당 선생님께 구두 보고할 것, 보건소 PCR 검사나 전문 의료인의 신속항원검사 등을 안내하고 관련 서류나 통보 문자를 내게 전송하도록 안내할 것, 학급 내 확진자가 발생할 시 학부모에게 별도 안내하고 배부한 신속항원검사도구로 주 2회 이상 검사하여 이상 유무를 알릴 것(학급 내 확진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주 2회 지정 요일에 검사하여 등교하도록 안내할 것), 자가 격리 대상자들을 위한 실시간 원격수업 제공 기반을 마련하고 웨일온 접속을 안내할 것, 확진 교사의 수업 대강이나 원격수업 시 학급 지도에 충원되면 가급적 거부권 없이 동참할 것, 방역을 위한 학급 소독과 출결 처리 기준에 대한 명확한 안내를 위해 컴퓨터 바탕화면에 코로나 관련 폴더를 별도로 만들어 정리할 것, 학생 파악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쏟아지는 코로나 외의 기본 업무까지 학년 초의 시간은 정말이지 혼돈의 카오스였다. 스물여덟 명의 전체 학생 중 열네 명이 확진되자 우리 학급의 코로나는 잠정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바야흐로 4월 18일, 개학 48일 만에 모든 학생들이 교실에 앉아 아침 조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학생들 한 명 한 명 증상은 달랐을 테지만 저마다 충분히 아팠을 것이고 집이나 방에 갇혀 핸드폰 하나로 버티어 낸 힘든 시간 동안 괜히 억울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을 터, 나 또한 휘몰아치던 정신없이 힘든 일들이 이제는 좀 괜찮아지게 될 것이라 위안했다.
한편, 우리 집의 상황은 어떠했나? 남편은 똑같았다. 지난 인사이동 이후 그대로 출근하고 퇴근했다. 직장 내 어떤 재미도 없어 보였고 합당하지 않아도 피치 못해 다니는 샐러리맨,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의 삶도 달라진 것 없었다. 큰 아이는 3학년이 되어 기존의 돌봄 교실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말고는 그대로였다. 절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 되어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화, 목, 금에 신청한 방과 후 배드민턴과 큐브 수업을 듣고 스스로 횡단보도를 건너 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오면 되는 기존의 동선에서 돌봄 교실이 빠진 것뿐이었다.
문제는 둘째 딸아이였다. 그녀는 오빠가 다니는 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나는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많은 일들이 있지만 나에게 학교는 재밌고 그 속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빼앗기기보다는 얻고 오는 편이었다. ‘오빠가 알아서 잘 적응했으니 너도 그럴 수 있을 거야. 집에서 학교 가는 길에는 교통 지도해주시는 선생님이 있는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니 오빠 따라 너도 같이 잘 갈 수 있어. 알아서 스스로 잘하는 법을 깨우치는 것도 중요한 교육이야.’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아니 많이 달라졌다. 큰 아이의 1학년은 2020년. 등교 지연, 원격 수업에 나는 비담임이었다. 업무는 많았으나 매일 아침 1시간의 육아시간을 쓸 수 있었고 아이를 챙길 수 있는 마음과 여유가 충분했다. 둘째의 1학년 2022년, 새 학교로 이동, 2학년 담임이자 학년 부장, 코로나 사태 악화, 그 차이를 큰 아이가 잘 커버해주기를 바랐지만 둘은 매일 아침마다 티격태격이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밥을 열심히 차렸다. 그런데 집안일이 어디 밥뿐이던가, 집에서는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환경이 달라진 두 여인은 더 힘을 내야 했고, 두 남성들은 더 잘 도와야 했다. 그리고 언뜻 그러했던 것 같고 삶은 그런대로 흘러갔다.
그럼에도 봄은 봄이었다. 어쩌면 봄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 해 전부터 오빠만 참여하던 지역 숲사랑소년단에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가 입단하면서 OT에 참석한 어느 토요일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숲 자락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벚꽃 사이로 필터를 적용시킨 것 같은 하늘빛과 하얀 구름이 펼쳐졌고 그 사이로 천천히 움직이는 조그마한 케이블카를 보고 있자니 미리 주문했던 봄이 이렇게 내 앞에 와 있는 듯했다. 4월의 하늘과 꽃과 바람과 숲, 그곳에 있는 아이들에게 또 내게 행복이 깃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에는 온 가족이 손을 잡고 동네 근처 하천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서 꽃비가 내리는 곳을 찾았다. 이 꽃들이 지고 내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나는 생각할 사 思, 봄 춘 春, 사춘기의 소녀들처럼 봄만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