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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사임당 Sep 06. 2022

비워낸다는 것, 비움을 동경하며  

마법의 책 _ 아잔 브라흐마,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한 여름의 꿈처럼 다녀간 친구가 내게 마법 같은 책 한 권을 주고 떠났다. 아잔 브라흐마가 쓴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였다. 나는 그 책을 한 장 한 장 아껴 읽으며 폭풍 같은 시간을 견뎠다. 핸드폰 배경 화면과 카카오톡 프로필에 흑백의 코끼리 한 마리로 바꾸고 매일같이 녀석을 들여다보았다. 매일같이 코끼리를 생각했다. 그 코끼리는 가끔 술을 마실 때도 있고, 금주를 할 때도 있고, 폭음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코끼리를 길들이는 법을 찾아 틈이 날 때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쓴 곳을 닦고, 닦은 곳을 더 닦으며 나는 견딜 수 있었다.

     

당분간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으나 정해진 약속을 무어라 거절할 이유도, 용기도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 수도 있음을'


 번은 이른 저녁에 조도가 낮은 맥주집이었고,   번은 흐릿한 오후 환한 카페였다. 마주한 그들 앞에서 수행자처럼 눈물짓지 않고 내가 마주한 현실을 정제하여 담담히 말했으나, 실은  거대한 코끼리가 계속해서  마음을 휘젓고 있었다. 어느 날은 잔잔하다가도 어느 날은 매섭게 요동치곤 했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틀렸으나 지금은 맞다. 인생에 답은 다.


그러던 어느 날, 술 취한 코끼리 한 마리를 주고 떠난 친구가 몹시도 그리웠던 밤이었다. 남편이고 아이들이고 아무도 없이 그 친구와 둘이서 조용한 스테이 공간에 가는 상상을 해보았다. 뜨거운 여름이 식어도 여전히 하늘과 잔디는 푸른 계절, 변산반도 어딘가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목조로 된 2층 공간이다. 백단향이 나는 인센스 스틱을 피운다. 선곡한 재즈 풍의 잔잔한 음악이 스피커로 흘러나온다. 친구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반신욕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나는 포근한 소파에 앉아 액자 같은 창 너머의 풍경을 보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친구가 문을 열자 욕실 밖으로 퍼져 나오는 따뜻한 공기와 좋은 향처럼 우리는 맑고 깨끗한 아침 대화를 한다. 그간 읽은 것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을 서로 바꾸어 읽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가볍게 식사를 하고, 주변에 있는 예쁜 공간을 한 곳 찾아 커피를 마시고, 밤이 되면 참깨처럼 쏟아지는 별을 보러 간다. 이내 상상에서 현실을 본다. 내 눈앞에 보이는 코끼리, 마음을 어지럽히는 술 취한 코끼리가 보인다. 그럴수록 나는 책으로 더 빠져들었다. 마침 바깥에선 비까지 주룩주룩 내린다. 거칠었던 땅에도, 퍽퍽한 마음에도


     

저자 아잔 브라흐마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후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태국 방콕으로 와서 수행승이 되었다. 서양인 불교도인 그가 전하는 108가지 일화를 차분히 읽으며 나는 인생과 삶,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세상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단 한 권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라는 책이다.”
- 아잔 차 (p.22)

     


야생의 코끼리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짓밟고 돌아다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 코끼리를 정복하지 않으면 삶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생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속 코끼리이다. 깨어 있음의 밧줄로 코끼리를 붙들어 맬 때 문제는 사라진다. 깨어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하면 코끼리는 통제하는 이도 없이 집착과 분노, 욕망과 쾌락 사이를 뛰어다닐 것이다. P.92      


“사랑하는 나의 미친 마음이여,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너에게 활짝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오라. 네가 나를 파괴하고 파멸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너에게 나쁜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나의 마음이여,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  P.116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물살이 당신보다 더 강할 때, 그때는 물살과 함께 흘러갈 때이다. 당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온 에너지를 쏟아부을 때이다. P.141


당신의 미친 마음과 싸우는 대신, 그 마음을 평화롭게 대하라.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거기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코끼리 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유일하게 열심히 한 것은 그저 청소였다. 제일 깨끗해지고 싶은 곳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자 나는 내 주변에 무심히 쓸고 닦고, 비우고, 얼룩을 지우고, 정리하고 그렇게 수일을 보냈다. 활자가 주는 순간의 깨달음이 시간에 무뎌지지 않기 위해 꽤 오래 주변을 청소하면서 생각했다.       


‘모든 것은 가득 채워지기 전에 늘 모자라게 비워야 한다. 많이 비워낼수록 더 많이 채울 수 있다.’


폭풍 같은 시간으로부터 지금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에서  뜨거운 여름 정도랄까, 다만  사이 이렇게도 마음이 편안해진 것은 바로 단순함에 있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 그렇게 시간을 밀도 있게 보내니 잡생각이 없어진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사는 , 물이든 생각이든 깊은 것은 위험하다. 얕고 잔잔하게, 채워지면  주변에 나누고, 불필요하면 과감하게 리며 나는 앞으로 그렇게 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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