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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Feb 01. 2017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은 사실 좋은 말이다. 누구도 대화를 독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득템’한 백소영 교수(이화여대)의 말이다. 이 말을 들으니 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이른바 '지식인 남성' 더 좁혀 이야기하자면,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 지식인, 3-50대 남성들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들의 언어/방식에 밀리지 않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해왔고, 그들로만 구성된 각종 행사가 무사히 굴러가는 데 기여했다. 물론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말이다. 물론 그들과의 대화나 협업은 나에게 귀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들의 세계에 간신히 속해있(다고 느꼈)지만 나는 분명 다른 존재였다. 여성 실무자인 내 의견은 종종 ‘본문’이 아닌 ‘참고문헌’이나 ‘각주’ 정도로 처리되었고, 내 위치는 주로 수직 구조 아래 ‘듣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자매님’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그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나를 충만하게 했다. 누가 누굴 가르칠 필요 없이 평등하게 생각을 교환하며 서로 배우고, 긴 설명 없이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수용할 수 있는 ‘접시 깨지는’ 만남을 이어가며 질문했다. 이렇게 지적이고, 슬기롭고, 속 깊은 여성들의 목소리는 왜 우리 사회에서 번번이 무시되거나 소거되어 왔을까? 어떻게 하면 다양한 목소리가 우리 사회의 ‘본문’이 되게 할 수 있을까? 경력과 나이가 쌓일수록 치밀어 오르는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을 반복하다가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만났다.

어쩌면 ‘작가’라는 ‘사회적’ 이름을 얻기 전까지 은유 또한 끊임없이 소거되어 왔던 목소리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글’을 붙들었다. 대학 진학 대신 직업의 세계에 뛰어들었다가 또래보다 일찍 결혼하여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가정 경제 몰락’을 경험한 이후로는 가사와 육아는 물론 생활비까지 벌어야 했던 ‘문필하청업자’ 노동계급 여성으로 살며 ‘울컥’할 때마다 시를 읽으며 글을 썼다고 한다. 그에게 글은 당연하게 걸치던 ‘가부장 체제’의 언어가 아닌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고 생의 질문과 마주하며 세상의 ‘부당’과 싸우는 무기가 되었다. 그의 에세이 모음집인 이 책은 그런 치열한 싸움의 기록이다. “존재하는 한 이야기하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는 그가 글을 쓰는 동력이 되었다.  


이 책에 담긴 여성, 연애와 결혼, 일에 관한 56개의 짧은 글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사사로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더 많은 독자를 만나야 한다. 거대 담론만이 유효하게 승인되는 세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무례한 가부장 질서를 1/N 몫으로 감당하고 있는 존재는 결국, 우리 곁의 ‘사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애를 주목하고,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재구성하는 과정이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 가부장 언어로 구성된 담론이나 ‘복음과 상황’이란 얼마나 부당하고, 불완전한 것인지 이야기하는 존재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이 책은 그들을 위한 바람직한 ‘빌미’다. 책 한 자락에 인용된 김수영의 시 구절처럼 ‘넓어져 가는 소란’을 단단하게 지지할 ‘노란 꽃’과 같은 용기가 당신 마음에 박히길 기대한다.


<복음과상황> 2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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