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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Sep 06. 2017

대중문화에서 여성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문화

없는’ 여성들


요즘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tvN, <알쓸신잡>)을 즐겨본다. 뮤지션 유희열, 소설가 김영하, 지식소매상 유시민, 뇌과학자 정재승, 음식평론가 황교익 5인이 펼치는 토크 프로그램이다. <꽃보다 할배> <삼시세끼>(tvN) 등으로 유명한 나영석 PD가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지식 셀러브리티’라는 재료를 모아 ‘인문학’이라는 양념을 더해 몇 년 사이 예능의 대표 콘셉트로 자리 잡은 ‘여행’과 ‘음식'이라는 요리법으로 조리하여 내놓았으니 재미없기 힘든 조합이다. 각 지역의 맛집과 명소를 거쳐 저녁 술자리에서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이들의 ‘토크’는 재미도 있지만, 의미와 전문성도 갖추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이순신에서 미토콘드리아까지 종횡하는 깨알 같은 ‘잡학’의 향연과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젠트리피케이션과 헨리 조지에 이르는 방대한 ‘교양’의 성찬을 접할 수 있다. 이런 호감과는 반대로 처음에 이 프로그램이 신설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시큰둥했다. “어휴~ 아재들의 수다를 또 봐야 해?”


10년 넘게 우리나라 대표 예능으로 인정받고 있는 <무한도전>(MBC)에서부터 <알쓸신잡>에 이르기까지 남성들로만 가득 채워진 예능을 보는 건, 사실 너무 익숙한 일이다. TV를 켜면 남성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남성채널’이라는 새로운 방송국이 생겨 채널 선택이 불가능하도록 기본 설정이 되었나? 비단 내 느낌만은 아니다. <여성신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상파 3사를 비롯해 JTBC, tvN 예능프로그램 진행자와 고정 출연자 316명 중 여성은 68명으로, 21.51%”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회뿐 아니라 TV에서도 ‘유리천장'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화면 한가득 남성들이 나와 여행을 가고, 음식을 먹고, 수다를 떤다. 어디 그뿐인가. 그 남성들이 요리도 하고, 육아도 한다. 심지어 아내를 여행 보내고 관찰하는 것도, 딸의 연애를 지켜보는 것도, 혼자 사는 일상도 모두 예능이 된다. 문화 매거진 <아이즈> 최지은 전 기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 정도면 숨만 쉬어도 아이템이 되는 수준”이다. 


이 ‘남초 예능’은 단지 예능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신개념 이슈 리뷰 토크쇼’를 표방한 <썰전>(JTBC)은 사회자를 포함한 중년(노년) 남성 네 명이 민감한 사회/정치 이슈를 놓고 흥미로운 ‘설전’을 벌인다. 해마다 연말·연초가 되면 각 방송사에서는 ‘신념대담’이라는 특별 토론회를 여는데 2017년 신년, 각 방송사에 초대된 ‘신년대담’ 토론회의 패널들은 모두 중년 남성들이었다(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썰전>이나 <알쓸신잡>에서 보듯 그들의 (술자리) 수다는 곧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교양으로 격상되고, 대화의 주제에 따라 담론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남성은 한국사회의 기본값이자, 주어이다. 남성들로 꽉 채워진 화면 어디를 둘러봐도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있는’ 여성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TV나 영화에 여성도 등장한다. 너무 편향된 시각 아닌가?” 물론 예능/드라마나 영화 등 각종 대중문화 영역에 남성’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존재 방식이다. “남성들로 꽉 채워진 화면 어디를 둘러봐도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는 문장을 이런 질문으로 바꾸어 보자. “대중문화 속 여성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요즘에는 안 보지만 한때 <비정상회담>(JTBC)을 즐겨봤다. 마치 ‘정상회담’ 구도처럼 앉아 동양과 서양의 각 나라를 ‘대표’한다는 젊은 남성들이 벌이는 토론은 재미도 있고, 유익했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도 다양하여 ‘젠더’ 관련 이슈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다루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을 즐겨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왕 각 나라를 대표한다는 패널들로 구성할 거면 성별도 다양하게 섭외하거나 여성 버전 비정상회담은 불가능한 걸까?” 이런 방식의 ‘여성 버전’ 토크쇼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미녀들의 수다>(KBS2)를 기억하는가? 각 나라의 ‘미녀’들이 나와 우리나라에서 경험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나누는 토크쇼다. 이 두 프로그램은 성별 구성만 다르지 우리나라에서 사는 외국인이 출연하는 토크쇼라는 면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들이 있다. 우선 프로그램 이름이다. <비정상회담>은 말 그대로 각종 이슈를 다루는 ‘회담’이고, <미녀들의 수다>는 무려 ‘미녀’들의 ‘수다’이다. 이름에서 드러난 차이는 곧 그들을 인식하고 활용하는 면에서도 다르다. 우선 <비정상회담> 속 남성들은 정장을 입고 나와 서로 마주 보고 토론을 한다. 반면 <미녀들의 수다> 속 여성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계단식으로 구성된 의자에 앉아 정면을 보고 이야기를 한다. 대화보다는 그들의 경험과 외모를 전시하는 방식이다. <비정상회담>을 이끄는 3인의 남성 사회자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패널이기도 하다. 이들은 사회자-패널의 관계가 아니라 평등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주체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간혹 여성 패널이 초대되긴 하지만, 남성들로만 구성해도 완결성을 가질 수 있다. 반면 <미녀들의 수다>의 사회자는 남성(남희석)이다. 사회자는 프로그램 전체를 이끌며 초청된 미녀들을 적절하게 통제하거나 발언권을 부여한다. 사회자는 미녀들을 이끌기도 하지만 '오빠'와 같이 그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 외 남성 연예인 패널들이 나와 그녀들의 수다에 호응하거나 돕는다. 비록 ‘미녀들의 수다’이지만 만약 남성 사회자와 패널이 없다면 이 프로그램은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도 여성들이 ‘타이틀롤’을 맡아 ‘말하는' 존재로서 ‘토크’라는 것을 하는 프로그램은 이제 거의 씨가 말랐다.


이렇게 대중문화 속 여성은 양적으로 소수이기도 하지만, 주체이기보다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최근 화제를 모은 <프로듀스 101>(Mnet)은 101명의 아이돌 연습생 중 대국민(?) 투표로 11명의 아이돌을 선발하여 데뷔시키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2016년에 여성 버전이, 2017년에는 남성 버전이 각각 방영되었다. 주목할 건 두 시즌의 주제곡이다. 둘 다 동일하게 'Pick me’를 반복하며 상대에게 어필하는 것 같지만 내용은 정반대다. 여성 버전은 "우리는 꿈을 꾸는 소녀/너와 나 꿈을 나눌 이 순간/달콤한 너를 향한 shining light/너만의 날’이라며 상대를 향해 호소하지만, 남성 버전은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나야 나/너만을 기다려 온 나야 나 나야 나/네 맘을 훔칠 사람 나야 나 나야 나/마지막 단 한 사람 나야 나 나야 나”라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동일한 입장이어도 남성은 주인공, 여성은 '너만의 날'을 만들어 줄 주변인(소녀)이다. 이런 차이는 단지 노래 가사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대중문화 속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예능에 출연하는 대부분 여성은 '메인 진행자' 옆에 앉아 방긋 웃거나 거드는 ‘꽃’으로 존재한다. 같은 아이돌 그룹이어도 여성 멤버에게는 외모나 태도에 관한 기준이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 뚱뚱하거나 못생긴 개그우먼은 조롱이나 혐오의 대상이 된다.


남성이 지식과 담론의 주체자인 '말'로 존재한다면 대중문화 속 여성은 대상화되고 전시되는 ‘몸’으로 존재한다. 엄마·아내·며느리 등 남성 중심 사회가 조직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몸, ‘청순한 글래머’ 부류의 착한 몸, 웃는 얼굴, 친절하고 센스 있는 태도 등을 대중이 원하는 조건에 최적화하여 ‘보여주는’ 존재다. 단적인 예지만 이 ‘차이’를 인식하는 건 중요하다. 그래야 화려한 화면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문제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까칠한’ 시선


다시 <알쓸신잡>으로 돌아가 우리가 환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고민해보자. 이 재미있고도 유익한 프로그램은 도대체 어떤 문제를 드러내는가? 우선 편향성이다. 그들이 벌건 얼굴로 술자리에서 쏟아내는 ‘잡학’은 너무 간단하게 일반 지식과 교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그 ‘일반’이라는 범주 속에 '여성이 말하는' 지식과 교양은 끼어들 틈이 없다. ‘여류작가’가 멸칭이라는 이야기를 남성 소설가 김영하가 아닌, 여성 소설가 아무개는 할 수 없는 걸까?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이야기, 각종 사회/과학적 지식을 알려줄 ‘여성 전문가’는 정말 없는 걸까, 굳이 찾으려 하지 않는 걸까? “그럴 만한 여성 전문가가 없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왜 여성에게 기회를 주어 전문가로 키우지 않는 걸까? 한국사회에서 ‘남성 전문가’가 저절로 만들어졌을까? 가정을 책임졌던 엄마나 아내, 진학을 포기하고 생업의 장으로 뛰어들었던 ‘누이’들이 등을 대고, 밀어줬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재’로 충만한 현재 한국사회의 대중문화 구도는 마치 그런 한국 근현대사의 결과인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이런 편향성은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대중문화에 여성의 주체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창구가 그만큼 존재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럴수록 우리 사회가 ‘지양’해야 할 고정된 성역할이나 여성차별/혐오 문화를 검증할 기회는 협소해지고, 숙고하며 ‘지향’해야 할 다양한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문화는 요원하다.  

너무 부정적인 전망일까? 희망의 징후는 있다. ‘젠더 토크쇼’를 표방한 <까칠남녀>(EBS)를 예로 들고 싶다. 여성 방송인 박미선이 사회를 보고, 각각의 입장을 대변하는 여성 패널과 남성 패널이 평등하게 토론을 한다. 패널들이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는 ‘여성 전문가’가 적절하게 개입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들이 다루는 주제들도 다른 프로그램과 차별화된다. 우리나라 TV에서 노브라, 맘충, 비혼, 피임 등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앞서 소개한 ‘남초 예능’과는 정확하게 반대다. 여성과 남성이 마주 앉아 함께 토론하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더 나은 지향을 상상할 기회는 불가능한 게 아니라, 이렇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까칠한’ 시선이 필요하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덤비는 것이냐” 반문할 수 있지만 “웃자고 하는 얘기”가 사실은 “하나도 안 웃기고 이상하다”는 사실을 까칠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우리는 비로소 ‘아재 예능' 너머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빗과소금>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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