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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Sep 18. 2015

아멜리 노통브, 그 불편한 첫경험에 대하여

『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열린책들, 2014.




 아멜리 노통브, 그녀의 이름은 SNS를 통해 타인의 가상 서가에서 익히 들어왔다. 오랜만에 찾은 도서관, 새로 입고된 책이 잘 정렬된 서가 앞에서 한참 서성거리다 익숙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고 책의 표지, 만듦새, 그립감에 매료되어 단박에 대출을 결심했다. (여담이지만 참 흠잡을 데 없는 디자인이었다. 늙은 노인의 수염을 연상케하는 '푸른 수염' 이라는 제목의 폰트를 억지로 흠잡고 싶을 정도.) 

 집중을 해서 읽었을 즈음엔 나는 오랜 시간 지하철에 몸을 구겨넣고 있어야 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무척이나 잘 읽히는 소설이었다. 대화가 주를 이루는 소설임에도 대화의 문맥이 자연스러워서 마치, 탁구 경기에서 랠리가 아주 오랜 시간 이어지는 걸 보고 있는 느낌. 어떤 감상의 느낌들이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이야기할 것이 별로 없다. 

 아래 열거해놓을 문장들이 내게는 이 책이 가진 의미 그 자체였으므로. 하지만 어쩐지 저자에 대한 불편함이 찝찝하게 남아있다. 여자친구에게 아멜리 노통브를 아느냐고 물으니, 자신도 몇 권 읽어봤는데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인물을 통해 (혹은 사건을 통해) 독자에게 가르치려든다는 느낌'이 강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 또한 이에 동감한다. 굳이 없어도 될 (어쩌면 없으면 더 좋을) 사견이 소설 곳곳에 알게 모르게 배어있다. 물론 이것이 그녀의 집필 방식이라면, 혹은 모든 소설가의 집필 방식이라고 누군가 지적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겠지만서도, 내게는 그런 것들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졌음이다. 



"제가 가버린다면?" / "그야 당신 자유요." / "안갈래요. 전 당신이 두렵지 않아요."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 "그것 참 묘한 답변이네요. 자기 자신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큼이나 위험해요." / p. 32
"닥치는 대로 먹고도 그렇게 날씬하다니, 참 경이롭군." / "그게 바로 젊음이라 불리는 거예요. 기억나세요?" / "맞소. 자신을 파괴되지 않는 존재로 느끼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별것 아닌 일로 자신이 이미 끝장났다는 걸 알게 되지." / p.64
사랑에 빠지는 건 우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현상이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그나마 설명이 크게 어렵지 않은 형식의 기적을 경험한다. 말하자면, 그들이 이전에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시한폭탄처럼 나중에 찾아오는 벼락같은 사랑은 이성에 대한 가장 거대한 도전이다. / p. 105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그 부조리한 일을 스스로에게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뒤늦게 자신과 협상을 벌인다 / p. 107
"신성 모독을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 "왜요? 무슨 위험이 있는데요?" / "당신은 하느님을 모욕하고 있소." / "그 역시 저를 모욕하고 있어요. 하느님이 저를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면, 저도 그와 똑같은 권리들을 가져요. 당신은 절 반박할 수 없어요. 당신 자신을 신으로 여기니까." / "오로지 사랑할 때에만." 사튀르닌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 p. 116
"사랑은 매번 새롭소. 매번 새로운 동사가 필요하겠지만, <사랑하다>라는 동사가 적절하오. 왜냐하면 모든 사랑에 공통된 긴장이 있고, 그 단어만이 유일하게 그것을 표현하니까." / p. 117
"진정한 사랑의 증거는 이미지를 많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완벽하 단 하나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있소." / "한 여자에게도 수많은 얼굴이 있어요. 사랑받는 여자에게는 더 많은 얼굴이 있겠죠. 수많은 것들 중에 단 하나의 얼굴을 어떻게 선택하죠?" / p. 129
"전 당신이 살인자가 아니길 바랐어요. 말하자면, 요즘 스타일의 멍청한 여자죠. 최근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착하고 결백한 뱀파이어들이 있다고 주장했어요. 사람들은 이제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주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악당들은 진짜 악당들이 아니에요. 그들 역시 선에 매료되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론들을 덥석 집어삼키고 조아하다니,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멍청한 똥 덩어리들이 되어 버린 거죠?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넘어갈 뻔 했어요." / p. 143
"난 미치광이가 아니라, 절대에 사로잡힌, 사랑하는 여자와 자신 사이의 정확한 경계가 무엇인가 하는 끔찍한 질문에 아홉 번이나 직면한 남자요." / p.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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