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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Sep 09. 2015

『선의 법칙』, 편혜영, 문학동네, 2015









신기정이 생각하기에 삶은 잡풀이었다. 손대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고 뻗어나가 대지를 잠식했다. 손을 대면 통제되고 다듬어지고 뽑히고 잘만 하면 모양을 갖출 수도 있었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지. 그렇게 평생 혹독하게 살아왔으면서. 신기정은 문득 '평생'이라는 말이 동생에게는 완료된 단어라는 걸 깨닫고 멍해졌다. / p. 31


 상자를 다시 들어올리는 순간, 별로 무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세오는 그제야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 그날 자란 게 있다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윤세오 안의 울분이 저 혼자 쑤욱 자라났다. 그걸 깨달은 후에도 그날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 p. 66


 이수호를 뒤따라 더위를 무릅쓰고 낯선 동네를 헤맬 때면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생각하곤 했다. 시작한다고 해서 시작되는 것은 없고 끝낸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윤세오는 이 일에 분명한 시작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모든 것을 결정짓는 단 하나의 지점. 이전과의 연속성이 깨지는 지점. 많은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 / p. 74


 시작점이 생겼으므로 종착점도 생겼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게 자신을 기쁘게 하는지 슬프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목표나 결의, 결심과 실행의 의지로 삶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멈춰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 p. 75


 김명국의 말대로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존재였다.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선의를 가졌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할 줄 알았다. 대부분의 일들이 불확실한 가운데 벌어지며 그 내막과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임에도, 인간이 선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은 세상의 몇 안되는 진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것이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것을 결행하려면 진실에 침묵해야 했다. 무엇보다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일도 하는 존재였다.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거짓말을 일삼고 농락하고 사기치고 협박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 p. 78


 "알고 보면 다 불쌍한 놈들이야. 채무자라고 떄리고 협박하고 약점 잡고 못살게 굴면 되겠냐?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되지. 인간이 인간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인간이 인간을 때려도 되니? 욕해도 되니? 물건을 뺏어도 되니? 당연히 그러면 안 돼. 알았어? 인간한테는 그러는 거 아니야. 하지만......"

 팀장이 말을 멈추고 이수호를 쳐다봤다. 이수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팀장이 히죽 웃었다. 불확실하고 모순된 웃음이었다. 한마디로 인간의 웃음.  

 "짐승한테는 괜찮아. 인간은 말이야. 개구리를 바위에 던져 죽여. 벌레를 손으로 꾹 눌러 죽여. 개를 발로 차. 구워먹고 삶아먹기도 해. 채무자들은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면 그렇게 무책임하고 무능력할 수가 없지. 걔들은 벌레야. 쥐야. 개구리야. 잘해야 개새끼야." / p. 95


 악의가 악이 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상상하고 품는 것만으로 악이 되는 걸까, 실행될 때 비로소 악이 될까, 실행하더라도 실패하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악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행동을 바꾸고 거처를 옮기고 생활을 바꾸게 해도 좋은 것일까. 그렇다면 악의는 환상이나 몽상인 걸까. 환상이나 몽상은 종종 현실을 바꾸기도 하니까." / p 96


 어떤 때는 하도 생각을 많이 해서 이미 그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실제 일어난 일과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을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었다. 미래의 시간인데 과거의 일처럼 여겨졌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그려보는 게 아니라 일어난 일을 되새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일에 대한 상상은 구체적이고 명확하며 세부가 뚜렷했다. 알려진 사실이나 자명한 인과가 아니라 추측과 비약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그랬다. 논리도 타당성도 없는 것이 깊이 파고 들어왔다. 윤세오는 이미 그것을 분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p. 101


 헛된 바람이었다. 늦어버렸다. 일단 마음에 품은 악의는 없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내면을 좀먹었다. 이수호를 떠올리면 윤세오는 쉽게 상처와 거짓말과 죽음과 분노의 세계로, 협박과 조롱과 폭력과 비아냥이 빈번한 곳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수호만의 세계가 아니었다. 윤세오는 이미 그 세계와 낯을 익힌 적이 있었다. 한때는 윤세오의 세계이기도 했다. / p. 135


 그 눈빛을 품고 지낸 사 년간, 시간은 참으로 울퉁불퉁하게 흘러갔다. 시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뭉텅 잘려나가게 될 것을, 그 삶이 버려지는 게 아니라 나머지 삶에 영영 덧씌워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 p. 174


 부이의 얘기를 들으면서 신기정은 세 사람을 두고 해온 자신의 짐작이 대부분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사람은 그저 홀로 존재하다가 어느 시기에 서로 연결되었을 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 누구의 삶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지 않았고, 무관하게 홀로 있지도 않았다. / p. 207


 지금은 그 일을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 우선 인생이라는 게 다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을 품었다가 결국 그것에 물리는 일. 아마 앞으로도 여러 차례 겪을 것이다. / p. 219


언제고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연은 원할 때는 못 본 척하지만 원치 않을 때는 조력을 베풀기도 하니까. / p. 227


 구기인은 언제나 가난했으므로 새삼 가난이 압박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다. 가난은 일단 낯을 익히면 계속 들이닥친다. 살수록 빚이 느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 p. 237


 두 사람의 대화를 관심 없는 척 듣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함께 간소하고 따뜻한 식사를 나눌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윤세오 가 삶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멀어진다는 뜻이다. 그러고 나서야 윤세오는 비로소 물을 것이다. 도대체 제 인생을 가지고 무슨 일을 벌였는지. / p. 245





매거진의 이전글 『페스트』, 알베르 카뮈, 책세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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