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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하 Jun 23. 2023

여름과 한여름 사이 일기

무더워도 너무 덥거나 시원해도 너무 시원했던 변덕스러운 어느 날들


1. 향수

영화로 처음 만나고 흠뻑 빠져버렸고, 소설로도 너무나 취향저격 당했던 '향수'. 향수라는 단어가 가진 서정적 어감도 마음에 든다. 중의적 표현의 의미도 좋다. 하지만 실제로 향수를 즐겨 쓰진 않았던 1인이었는데 최근 향수 브랜드 홍보를 담당하면서 관심이 생겼다. 탑노트 베이스노트 뭐 그런 전문적인 지식은 아닐지언정 향수를 만든 사람들의 애정이 담긴 스토리, 그리고 잔향이 주는 반전 매력 같은.. 별거 아니지만 소소한 향수의 매력에 입문 중. 향수의 소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무형의 잡히지 않는 실체, 그리고 찰나에 코끝을 스치는 향을 남기고 빠른 시간 내에 휘발되어 버리는 향수라는 것에 사람들은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한다. 그 향이 가진 추억과 이야기를 사는 것. 굉장히 미래지향적인 소비란 생각이 들었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지만 잠시라도 내 곁에 머문다는 것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돈을 쓰는 것. 참 고차원적인 소비 같다.


2. 재택근무

엔데믹으로 재택근무도 차차 사라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아직까지 우리 회사에선 월 2-3회의 재택근무가 허용되고 있다. 사실 이미 재택근무의 효율성을 오랜 시간 경험한 지라 굳이 왜 재택근무라는 좋은 제도를 축소해 나가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하튼! 세 살 아기를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재택근무는 꿀 오브 꿀 복지인 것은 사실. 경기도민의 서울 출퇴근은 생각보다 빡세서, 어린이집에 8시 전에 등원시키고 출근을 하는데 재택의 날엔 다른 아이들이 보통 등원하는 시간대인 9시 전후로 여유 있게 아침시간을 아이와 보내고 등원시킬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다. 퇴근하고 들어오면 곧 아기가 졸려할 시간이라 저녁시간도 함께 오래 보내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인데 이럴 때 재택이 너무나 큰 힘이 된다. 복지랄 것도 별로 없는 회사에서 이 제도만큼은 부디 얇고 길게 가져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재택근무 위주의 회사로 이직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


3. 둘째에 대한 고민

절대 없을 것 같던 둘째 계획. 아이가 두 돌이 지나고 소통도 잘 되어가고 말 배우며 너무너무 이쁜 짓만 골라하다 보니 서서히 스멀스멀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건지 생각이 들고야 만다. 커리어에 대한 생각, 현실적인 신생아 케어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 보면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일 시기에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긴 하다만, 이 모든 것을 이겨 넘을 만큼 예쁠 아기란 존재. 아니야 그 힘든 일을 다시 또? 하면서도 얼마나 귀여울까 이름은 뭘로 할까 성별은 어떨까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에 그저 웃어넘겨보는 중.


4. 팀 이동

담당하던 브랜드 계약이 종료되면서 새로운 업무를 담당하는 타 팀으로의 이동을 제안받았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에 있어 두려움이 존재하지만 나의 무기인 친화력과 빠른 적응력으로 사실상 금방 스며들 것 같은 예감이긴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바로 그 팀의 팀장이다. 그분과는 이미 세 번의 협업 경험이 있고 항상 좋은 영향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하지만 최근 소문에는 예전 같지 않고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모습에 팀 내 분위기도 좋지 않고 불통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이야 익숙해지면 그만이지만, 나의 가장 큰 걱정은 관계가 좋던 그분과의 사이가 틀어질까 무섭다는 것. 지금까지 잘 지낸 관계가 하루아침에 손절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고민은 깊어져 간다.


5. 발작버튼

남편과 다툴 때 가장 큰 요인이 나의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라 하면 무언가를 속이고 둘러대는 것인데 나의 거짓말은 나를 합리화하고 보호하려는 의도가 너무 강한 나머지 현실을 부정하고 아닌 척하는 모습이 뻔뻔스러울 정도이며, 그런 모습을 남편은 절대 참을 수 없고 그 때문에 아주 사소한 일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만다. 내가 잘못한 부분을 빠르게 인정하고 사과하면 거기서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에겐 그게 참 쉽지가 않다. 나의 잘못을 덮고 싶고 들키고 싶지 않고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고 억울한 척해보는 일이 숙명같이 느껴지곤 한다. 이런 모습이 더 화를 돋운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나도 나를 이해하기 힘든 순간이 있는 법. 누군가에게 나의 행동이 발작버튼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지만 나도 내 자신의 제어버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고질병에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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