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철에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출근하는 법
하루 24시간 중 가장 힘든 시간을 꼽으라고 하면 아침이 아닌가 싶다.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 9시까지 선릉으로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내가 출근시간에 주로 거쳐가는 역은 2호선 지하철 영등포구청역에서부터 선릉역까지다. 지하철 어플로 보면 영등포구청역에서 선릉역까지 36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그러나 출근시간에는 연착으로 인해 50분이 넘게 걸릴 때도 있다. 그것도 꽤 자주.
사람이 가득 찬 지하철 안에서 50분간 버티고 서 있는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선릉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면 이미 그날의 체력을 다 소진한 느낌이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 아침에는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보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겁나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출근길 지하철에서의 나를 보면 성악설이 맞다.
만원 지하철에서는 사람이 밀고 밀릴 수 있는 것인데 유독 왜저러지 싶은 사람을 보면 정말 속에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 것이 지하철에서 작은 비명 소리나 싸우는 소리가 꽤 자주 난다.(일주일에 한번씩은 듣는 것 같다)
‘아악!’, ‘아 밀지 마세요’, ‘사람 많은데 어떻게 안 밀어요?!’ 등등. 신기한 게 같은 구간에 똑같이 사람이 많아도 퇴근길에서는 이런 신경질적인 소리가 안 난다.
결국 출근길 지하철에서 조금이라도 편안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1년동안 연마했다.
1. 사람이 많이 내리는 칸에 탑승한다.
신도림, 구로디지털단지 등에서 환승 계단이나 출입구 계단과 가까운 칸에 탑승한다. 그럼 사람이 한꺼번에 많이 내릴 때 운 좋게 자리에 앉거나 앉지 못하더라도 좀 편한 자리를 선점할 수 있다.
2. 곧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 서 있는다.
신도림 등에서 사람이 많이 내릴 때 의자에 앉으면 좋지만, 바로 앉을 확률은 매우 낮다. 대신 그때 강남까지 안 가고 곧 내릴 것 같은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 바로 앞에 선다. 어떤 때는 정말 묻고 싶다. ‘혹시 어느 역에서 내리시나요? 빨리 안 내리신다면 다른 분 앞에 서서 대기하려고요.’ 하지만 물어볼 수 없으니 관상을 보고 이 사람이 어디서 내릴지 추측해야 한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50대 이상에 편한 차림을 하고 있다면 사당 전에서 내릴 확률이 높다. 거의 90%다.
두 번째로 선호하는 사람은 아예 어려보이는 캐주얼 차림의 학생이다. 강남 출근 보다는 신림, 서울대입구 쪽에서 내릴 확률이 높다.
또 비슷한 선택지 중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창 밖을 내다보며 지금 어디까지 왔나 확인하는 사람 앞에 선다. 그런 사람이 더 빨리 내릴 확률이 높다.
가장 선호하지 않는 사람은 누가 봐도 회사에 출근하는 것 같은 옷차림의 30~40대 남성이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절대 그들 앞에는 서지 않는다. 50분 동안 언제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희망고문만 당하다가 1분도 앉아보지 못하고 강남까지 같이 오게 될 확률이 높다.
3. 재밌는 컨텐츠를 준비해간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하더라도 지겨울 때가 많다. 침대에서 핸드폰을 하면 시간이 순삭인데 이상하게 출근길에서는 인스타 릴스나 유튜브 쇼츠를 무의미하게 넘겨도 시간이 영 안 갈 때가 많다. 출근길에는 보다 확실한 컨텐츠가 필요하다.
나는 재밌는 소설책을 읽는다. 앉아서 읽으면 베스트고, 앉지 못하더라도 앉아있는 사람 앞에 서 있으면 앞 공간이 확보돼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재밌는 소설에 빠져서 가다 보면 어떤 때는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고 더 책 읽다가 들어가고 싶을 때도 많다.
가끔은 책 읽기 너무 어지러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보지 않고 아껴놓은 영상을 본다. 기다려온 예능 에피소드나 딱 봐도 재밌을 것 같은 영상은 집에서 보지 않고 아껴뒀다가 출근길에 본다. 그래야 지하철에서의 시간을 견딜 수 있다.
이렇게 출퇴근한 결과 일주일에 5일 중 절반 이상은 앉아서 출근하고 있으며 작년 한해 30권 이상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은 정말 무시무시한 적응의 동물이다.
올해 나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일주일에 단 하루만이라도 재택근무를 하는 것!
아니면 주 40시간 미만으로 근무하는 것!! (가능할까?ㅋㅋㅋ)
저출산 대책이라며 여야당 할 것없이 대책 발표를 하고 있는데 30대 기혼 여성으로서 나에게 와닿는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3인 가족분의 생활비를 벌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겨우 나 하나 먹고 살만큼의 생활비만 벌고 있는데 서울에서 9 to 6 출퇴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의 모든 체력을 쏟아붓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직장 근처에 집을 마련하지 못한 문제일까, 체력이 약한 문제일까, 집 근처 직장으로 이직하지 못한 문제인가, 재택근무를 하는 회사로 이직하지 못한 문제인가. 나의 문제인건가, 사회의 문제인건가. 어쨋뜬 선릉역을 빠져나오면 나의 모든 체력은 소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