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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윤 Oct 29. 2015

지워낸 날들의 이야기

지워낸 날들의 이야기




1.


지리에 흥미가 없는 나는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잡다하고도 나름 필요한 것을 잘 가르쳐주는 한국의 의무교육 덕분에 적도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적도 너머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리 놀라지는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는데, 깊은 토끼굴로 떨어지고 있던 앨리스가 공중에 떠 있는 지도를 보고는 '지구 반대편으로 가고 있는지도 몰라!' 라고 외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나라들을 여행해봤음에도 불구하고, 적도 너머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처럼 느껴졌다. 내가 머리 속으로 그리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 말이다.


내가 가야 할 곳은 덩어리진 큰 대륙 옆에 두 동강난 작은 연필심처럼 박혀있는 나라였다. 출국을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그 곳을 비행기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며, 비행기 안에서 적도를 넘을 때는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 느낌 없다는 사실에 놀랐고, 목적지에 내렸을 때는 정말 이상한 나라로 와버린 것은 아닐까 소심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천공항처럼 거대하지는 않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공항에, 투명하고 맑은 햇빛이 어디든 내리고 있었다. 공기에서 딸기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 때의 그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커다란 짐가방과 함께 홀로 남겨진 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었고, 당장 어떻게 될 지 전혀 알 수 없는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빛깔과 모양의 하늘이었지만 그 아래에는 그런대로 비슷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이 묘한 기분으로 내가 배정된 기숙사로 향하는 셔틀 버스를 탔다. 6월에 맞는 찬바람은 마음을 다소 진정시켜 주었다. 그러나 내가 계절과 바다와 하늘을 건너 오직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 모든 맥락과 연결고리가 끊긴 채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문득 미아처럼 두렵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단 몇 시간만에 뒤바뀐 세상, 하늘과 들판이 어디에든 펼쳐지는 세계, 6월에는 차가운 비바람이, 1월에는 뜨거운 햇빛이 머무는 나라, 그 곳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러하였다. 유쾌한 동시에 두려웠고, 열정은 막막함을 겉돌고 있었다. 앞으로의 나날들을 모르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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