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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윤 Nov 06. 2015

지워낸 날들의 이야기

지워낸 날들의 이야기




3.


나라는 7, 8월이 겨울이었다. 영하로 내려가지는 않지만 기온이 떨어지고 습도가 높아져서 추위가 은근하게 살 속으로 파고드는 그런 날씨였다. 그리고 비바람이 많이 불었다. 하루에도 대여섯번씩 비바람이 왔다 가고, 그치면 언제 흐렸냐는 듯 쨍 맑아지고, 맑다가도 햇빛과 동시에 다시 비가 내리고 그런 날이 반복되었다. 이런 날씨 탓에 사람들도 번거롭게 우산을 소지하기 보다는 모자가 달린 옷이나 우비를 입어 그때그때 비를 피하는 것에 더 익숙해했다. 비는 차갑고 흩날렸다. 햇빛은 따뜻하고 티끌 하나 없었다. 그래서 해와 비가 동시에 내리는 날 바깥에서 비바람을 맞고 있으면 몸이 빛나는 거품으로 변해 날아가버릴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간지럽고도 선뜩한 느낌에 온몸이 나부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기 시작을 삼 주쯤 남겨두고 있을 즈음에야 학생들은 기숙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두 명의 여학생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셋 다 같은 나라 같은 학교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N과 나는 경제학 전공, S는 경영학 전공이었는데, 우리 셋은 바깥 나들이를 좋아하고, 각자 스스로를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싫어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금세 가까워졌다. 우리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두어 개의 섬들, 버스를 한참 타고 가야 나오는 외국인 마을, 꼭대기에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딱 한 그루만 심어져있는 언덕, 양들이 푸른 잔디 위를 자유롭게 거닐고 있는 넓은 공원, 며칠에 한 번씩 서는 원주민 장터 등을 돌아다녔다. 나라는 어딜 가나 초록빛이었고 드넓었다. 빨강, 주황, 노랑, 연두, 파랑, 보라, 검정, 잿빛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하늘 뿐이었고, 그 아래에는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만 같은 조용한 색깔의 집들과 한없이 펼쳐져 지평선을 이루는 들판, 다양한 명도와 채도의 푸른색들이 켜켜이 쌓여 오래도록 고정된 바다가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돌고래를 가까이서 보고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는 북쪽 끝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화창하고 맑은 날씨였는데,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잿빛 구름으로 뒤덮이며 점점 흐려지더니 거의 태풍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만한 비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비는 계속되었고, 안내원은 오늘은 날씨 때문에 바다에 가까이 갈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그럴 만한 풍경이었다. 회색 바다는 세게 부는 바람에 마음껏 펄럭이며 땅과 하늘을 몰아치고 있었고, 비산하는 빗방울은 아래로 내리지 않고 오히려 사방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옷을 입고도 비에 푹 젖어버린 우리는 아쉬운 마음에 둑을 따라 조금 걷다가 이내 단념하고 눈에 들어오는 가장 가까운 주점으로 들어갔다.


훈김이 도는 주점 안에는 벌써 사람들이 많았다. 어둡고 약간은 붉은 조명이 사람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며 흐르고 있었고,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둔 사람들은 서로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따뜻하게 데운 칵테일이나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주점의 한쪽 벽면은 바다를 잘 볼 수 있도록 전체를 창으로 내놓고 있었고, 창이 난 쪽의 반대편에는 바와 주방, 벽난로와 작은 무대가 있었다. 운 좋게 벽난로 옆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비를 털고 앉아 각자 마실 것을 주문했다. 느긋한 주점 안의 분위기와 나른하고 온화한 공기가 방금의 긴장과 추위를 풀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벽난로 안에는 작지만 만족스러운 몸짓으로 흔들리는 불이 타고 있었다. 가사가 없는 낮고 부드러운 음악이 스피커로부터 주점 안을 몽롱하게 휘감았다.


그렇게 몸을 녹이며 저마다 조용히 술을 즐기고 있는데, 어느새 음악이 끊기더니 앞쪽 무대로 한 남자가 올라왔다. 그는 중키에 검은 머리, 검은 눈썹을 한 라틴계 외모로, 단정한 셔츠와 청바지의 수수한 차림이었다. 남자는 앉아서 손에 든 기타를 잠시 고르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오늘은 비가 아주 많이 오네요 여러분. 저도 이런 정도의 비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요. 파도가 정신없이 춤추는 것이 여기에서도 보이네요. 여기까지 여행 오신 분들 아마 바다와 돌고래를 만나러 오셨을텐데 못 보시게 되어 대단히 유감입니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오늘밤에는 술과 노래가 더욱 따뜻하고 특별하게 느껴지시지 않을까 하는데요. 다들 익숙해하실 만한 노래로 제가 몇 곡 들려드리려 합니다. 이런 밤은 오늘 뿐이고, 여러분들을 만나는 것도 아마 오늘 뿐일테지만, 노래는 영원하고, 이 특별한 밤에 힘입어 어쩌면 오늘의 기억을 노래에 심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눈을 감고 기타를 연주하며 남자는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는 '렛 잇 비'나 '빈센트' 같은 오래되고 유명한 팝송이 대부분이었다. 몽롱했던 주점 안은 이내 남자의 노래, 사람들의 흥얼거림, 그리고 모든 이들의 눈빛으로 가득찼다. 나는 문득 나의 위치를 떠올렸다. 남반구의 어느 나라에, 비가 내리는 북쪽 끝에서, 비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만나지도 듣지도 못했을 사람들과 노래들, 그 한 가운데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깥에서 아직도 우르릉대며 몰아치는 바다와 비바람, 벽난로에서 창밖의 바다 모양을 흉내내며 노란 빛으로 타는 작은 불덩이, 이야기하듯 노래하며 주점을 그 밤의 등불로 만드는 출신 모를 어떤 남자, 그 삼각형의 가운데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을 보내고, 어떤 곳에서는 해가 뜨고, 어떤 곳에서는 해가 지고,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끝나고, 혹은 누군가가 태어나고, 아니면 생을 다하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이 노래를 듣고 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을 그들의 순간들과 내가 겪고 있는 나의 순간이 교차되어 떠오르고,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나는 이 지구에서 한낱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나를 생각했다. 멀리에서 스스로를 조망해본다는 것이 내게는 어떤 무게 있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내 존재의 한계와 보잘것없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과 동시에, 내가 처해있는 이 위치의 행복과 사랑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 나 자신을,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격려하고 위로해주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 그 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따뜻했고, 평화로웠고, 특별했고, 그리고 남자의 말처럼 정말로 그 날의 기억을 노래에 심을 수 있었다.


밤이 좀 더 깊은 다음에야 우리는 주점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기숙사의 내 방이 '집'이라고 느껴진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나는 방에 도착하여 스탠드와 라디에이터를 켰고, 침대 위에 엎드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지 않는 도시는 고요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노래와 벽난로 곁에 있었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나는 앞으로의 삶에 드리워질 적막을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한낮의 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삶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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