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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ric May 19. 2020

편지


내가 최근에 좀 못되게 굴었지, 미안.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를 챘을지 모르겠지만, 너는 느끼고 있었을지 아닐지 잘 모르겠다. 아니다, 그냥 너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내가 너를 알고 있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슬며시 들어 보이는 게 섬찟해졌달까. 2009년부터, 그래,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너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근에는, 그래, 맞아, 네가 좀 미웠다. 네가 올리는 게시물도 다 보기 싫었고, 다른 친구랑 잘 놀러 다니는 것도 괜히 밉더라. 글쎄, 무슨 감정이었을까? 인정하긴 싫지만, 너에 대한 부러움과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시기 섞인 감정이라고 하는 게 지금 바로 내가 너에게 느끼는 감정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그런 미운 마음이 요새 들끓다 못해 스스로 제어가 안 돼서 다른 이에게 털어놓을 때가 있어. 그런데 오늘 너에 대한 미움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다가 돌아온 말이 정말 충격적이더라. 뭐라는지 아니?

' 친구 상처 받겠다...’


그 말을 들은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 알게 뭐야, 나도 상처 받았어, 그냥 미워, 꼴 보기 싫어, 했거든. 그러다 문득, 아, 걔도 사람이지, 걔도 상처 받겠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좋은 친구일 텐데, 나한테만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상처 받았겠다, 왜 그걸 몰랐지, 하고 생각했어.


어디서 나온 근거 없는 오만함 때문인지 나는 근 10년을 넘게 너를 내 밑에 있는 사람 취급하듯 했던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골몰해보자니, 오랫동안 들어온 너의 푸념과 거기에서 기인한 너의 역할, 네가 힘들어할 때마다 너의 하소연을 들어줬던 나의 역할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런 관계가 10년이 지속되니, 그 세월들이 어느새 나를, 너보다 더 어른 같고 너보다 더 위에 있고 너보다 더 똑똑하고 너보다 더 현명하고 너보다 더 언니 같고 너보다 더 갑인 것만 같은, 그런 환상과 우월감에 빠지게 했더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평소에 평등에 대해서 지껄이던 내가 부끄러워서 그동안 했던 모든 말과 나의 가식을 다 주워 담아 태워버리고 싶었다. 평등, 공평 입으로만 주절거리더니 나는 너라는 사람에게는 단 한 번도 평등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참 서늘했다.


내가 뭐라고, 나까짓 게 뭐라고 그런 우월감에 젖어 살았을까, 싶어서, 너에게 미안하다가, 그동안 했을 나의 언행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 아찔했어.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너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너에게 먼저 만나자고 요청을 했던가? 곱씹었어. 너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에도 네가 너무 미워서 바쁘지도 않은데 바쁜데 왜 전화하냐고 한 소리했었지. 나까짓 게 뭐라고, 내 시간이 뭐라고, 바쁘다는 핑계로 너의 연락을 받지 않았을까. 수요일에 뭐하냐고 물었을 때도 일한다는 짤막한 답변만 돌려줬고, 네가 남자 친구와 헤어졌는지 궁금했어도 나는 절대 너에게 직접 묻지 않았고, 걱정이 되어도 직접 그 걱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네가 왜 본인은 자꾸만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고생을 하냐며 하소연할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지겨움을 알면서도 벗어나고자 하는 네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그저 답답해하며 잔소리를 했었지. 공감을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우리 관계에서 늘 손을 내밀어준 건 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띵하다. 너도 상처 받는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왜 나는 잊고 살았을까? 다른 친구들에게 대하는 만큼 너에게도 조심스럽고, 존중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들어왔어.


글쎄,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네가 날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의존하고 싶진 않았을 것 같다. 네게 내가 필요할 때마다 나는 거기 없었고, 있어도 쓸모가 없었어. 나는 네가 저 필요할 때만 연락한다며 씩씩거리며 화가 나있었는데, 돌아보니 그게 바로 내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네게 내가 필요할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거기다 의지할 수 있을 만큼, 정말 언니처럼 내가 그 자리에 서서 너를 위로해줬더라면, 지금 우리 관계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이런 표현을 원체 하지 않는 터라, 이 이야기를 듣고 놀랄지도 모르겠다. 미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할 거고, 얘가 곧 죽으려고 그러나, 싶기도 할 거다. 전자 후자 양 쪽 모두 말이 된다고 생각해. 사람이 원래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지.


그런데, 그냥,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너에게 그냥 차갑고 딱딱한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이 기회를 통해 말하지 않으면 평생, 너를 아는 동안은 물론이고 너를 모르게 될 시간에도 말을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속마음을 차분히 적어 내려갔다.


결론은 뭐 딱히 없어.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만큼 너를 생각하기로 했어. 다른 사람에게 노력하는 만큼 너에게도 노력하기로 했고, 다른 사람에게 대하듯이 너를 대하기로 했어. 너무 늦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또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소름 끼치니까, 너무 티는 나지 않게.

조금씩, 천천히, 너를 더 존중하려는 법을 배워보려고.


그건 그렇고, 요새는 어떻게 지내냐? 잘 지내냐? 남자 친구랑은 헤어졌나 보네? 걱정된다, 언제 한 번 대전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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