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yric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yric Oct 02. 2021

빨래 못 하면 죽는 병에 걸렸습니다.

빨래를 주제로 글을 쓰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었어요.

이미 제 작가의 서랍에는 빨래를 주제로 한 글이 몇 개 있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마무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글쎄요, 저랑 같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자 취미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살면서 아직까진 저와 같은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진 분들을 한 명도 만나보진 못했습니다.


스트레스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빨래에 집착을 합니다.

혼자 살면 주에 1-2번 정도가 적당한 편일 텐데, 화요일과 목요일(혹은 금요일)은 기본이고 새 옷을 사면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까지 3번을 연달아할 때도 있습니다.

계절이 변하는 시기에는 계절 갈이를 위한 이불과 옷을 빨래하느라 하루에 2-3번을 하기도 해요.


그래도 환경을 아주 철저히 무시하는 편은 아니라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해 환경을 생각하려고 하는데, 빨래를 한 번 할 때마다 사용되는 물의 양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무거운 스트레스 해소법입니다.


한 달 정도 미국 여행을 갔을 때에도 1순위는 빨래방 찾는 일이었습니다.

보통은 여행 가기 전에 항공과 숙소를 먼저 예약해두고 가는 편이니, 숙소는 미리 정해져 있었고 그 근방에 빨래방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등 빨래방에 대한 정보 파악을 정말 중요시했어요.

한 달을 묵는 동안 빨래방에 최소 4번 이상은 간 것 같네요.

LA에 있을 때에는 주에 3번도 갔었어요.

빨래를 바리바리 싸들고 낯선 골목을 헤매던 기억이 있네요.


어릴 때부터 결벽증 기질이 다소 있긴 했어요.

어릴 때에는 방에 정리해둔 침대가 어질러지는 게 싫어서 침대 위에서는 자지도 않고 꼭 거실에다 이불을 깔아서 자곤 했어요.

책상 위의 물건도 늘 각을 잰 듯 정해둔 각도에서 어긋나는 게 보기가 힘들어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책상과 침대 위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것을 보고 생각했죠.

내가 사용하지 않는다고 깨끗하고 정리된 것이 아니구나, 내가 사용해야 먼지가 앉지 않겠구나.


그 이후로는 조금 나아졌어요.

점차 정리하는 것에는 조금 둔해지는가 싶었죠.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정말 사람이 한순간에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방이 정말 더러웠어요.

그렇게 깨끗함을 유지하려고 기를 쓰던 제가 한순간에 뒤집어진 거죠.

그땐 모든 게 무너졌던 것 같아요.

물론, 그 안에서도 저만의 규칙으로 청결을 유지하긴 했지만요.


그러다 점점 다시 청결함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딱 내딛는 첫발에 닿는 뭔가 밟히는 느낌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남들은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던데, 제 발바닥에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먼지 한 톨 한 톨이 다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 결과 지금은 하루에 청소를 2번 하는 날도 생겼고, 일을 끝마치고 너무너무 피곤해도 청소를 해야 침대에 누울 수가 있습니다.

그냥 자고 싶어도 반드시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어야 잠에 들 수가 있어요.

세탁기에 빨래가 들어있는 꼴을 보지를 못하겠어요.


그나마 이렇게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나서 스트레스라도 풀리면 다행이지만, 청소도 빨래도 다 했는데도 스트레스가 풀리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한 날이 있어요.

그런 날은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나 오늘 청소도 했고 빨래도 했는데 왜 마음이 이렇게 갑갑하고 답답하지? 뭘 더해야 이 불안한 마음이 진정이 될까? 싶습니다.


피곤하게 사는 성격이라 하루 여행을 가도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옷도 고이 접어 하나씩 정리해서 가져가는 편이고, 어디 며칠 먼 곳에 다녀오면 청소랑 빨래? 당연히 합니다.

먼 길을 다녀와서 너무너무 피곤해도 바닥을 닦고 빨래를 해야 그제야 쉬는 기분입니다.


동료들과 지인들, 친구들은 청소와 빨래가 스트레스 해소법이라는 말을 듣고 의아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면서도 자기네 집 와서 청소해달라고 하기도 하죠.

그런 말을 들으면 내심 이런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진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고, 별다른 특별한 취미가 없는 스스로가 가엾기도 해서 기분이 참, 뭐랄까, 묘해요.

이런 결벽증 기질이 성인 ADHD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어요.

맞는가 싶기도 해서 씁쓸할 때도 있었네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게 저라는 사람인데요.

바꾸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아 그냥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하게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목요일에도 빨래하고 청소했습니다.

금요일에도 했고요.

오늘도 했어요.

아마도 지금 제 마음이 저 모르게 고생하는 중인가 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