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다닐 때 졸업을 하려면 독일어 자격증 따기 vs. 졸업논문 쓰기 중 선택해야 했을 때 그 당시 미래에 대한 계획도 일절 없고 너무도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대학생활을 했던 나머지 두루두루 이득이 되는 자격증 대신 졸업논문을 쓴 적이 있다.
독문학 전공이라 독작가인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고 포스트 모더니즘과 연관 지어 쓰는 논문이었는데, 논문 내용이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하는 것들은 다 증발해 버리고 책 내용만 여전히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아무래도 논문을 쓰려면 1 회독으로는 충분치 않으니 다회독을 하느라 그랬으리라.
유명하다 못해 다양한 형태로 세상에 나온 원래의 그 책을 나는 4년간 독문학을 전공했으면서도 졸업하며 겨우 읽어보았다.
논문을 쓸 때는 책에 하이라이트, 연필로 밑줄, 플래그도 엄청나게 붙여가며 세상에서 혼자 그 책을 연구하는 사람처럼 미쳐 살다가 졸업한 뒤로는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요즘 불현듯 떠오르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것도 향에 미쳐 살인까지 저지른 주인공 ‘그르누이‘가 너무나도 다양한 냄새가 넘쳐나는 파리로부터 벗어나 깊은 동굴로 들어가는 장면인데, 부쩍 요즘 자꾸만 자꾸만 깊은 동굴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내 모습 같아서였을까.
아무리 아무리 깊고 어두운 동굴로 들어가도 계속해서 맡아지는 지독한 냄새처럼 아무리 나만의 동굴로 숨어 들어가도 자꾸만 마주해야 하는 인간관계가, 내 인생이, 마주해야 할 현실이 너무 힘겨웠었다.
길고 어둡고 끝없는 터널을 혼자서만 걷는 것 같아 답답하고 무서워 빠져나가고 싶어 하면서도, 계속해서 더 깊은 굴 속으로 파고들고 싶어 했다.
사람 때문에 무너지는 기분이 들 때면 책에서 해답을 찾고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요 근래에는 자기 전에 벽에다 다리를 두고 누워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 게 너무도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어제는 여느 날과 같이 벽에 다리를 두고 원서를 소리 내어 읽는데 너무도 평화롭고 마음이 편안하다는 느낌이 온몸으로 느껴져 그 행복을 오롯이 느꼈다.
최근에 와서야 그토록 유명한 ‘노인과 바다’를 읽었는데, 엄청난 문장가라는 헤밍웨이가 도대체 얼마나 엄청나길래 하는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노인과 바다’는 읽기 시작한 처음부터 끝까지 이게 뭐지, 하는 마음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이해가 되지를 않아서 엄마한테 물어보기까지 했는데도, 왜 다들 헤밍웨이가 문장가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런데 예전에 친구의 추천으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너무 난해해서 그 작가의 작품은 다시는 읽지 않으려다 그래도 다시 한번 더 도전해 본 기억이 났다.
(그 이후로 쿤데라의 책을 두세 권을 더 읽기는 하였으나 더 가까워지진 못했다. 아무래도 진정 나하고는 맞지 않는 작가였나 싶지만, 그동안 인생에서 많은 변화를 맞이하며 참존가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그 뒤로 다시 읽은 소설이 ‘무기여, 잘 있거라’.
초반에는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중반으로 갈수록 몰입감이 높아졌고 후반부에 도달하자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도무지 멈추지를 못 하겠더라.
그러다 e-book의 대출 기한이 지나버려 그냥 포기할까 했지만,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다시 빌린 지 단 하루 만에 완독 했다는 엄청난 비하인드가..
그리고 다음 타깃으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 책은 헤밍웨이의 자살한 아버지에 대한 책이라길래 그런 아버지를 둔 헤밍웨이의 심리가 더욱 궁금해져 오늘이나 내일 e-book을 빌려볼 생각이다.
모름지기 책은 실물 책이 읽는 느낌을 물씬 느끼게 해 주어 좋긴 하지만, 자기 전에는 조명을 다 끄고 휴대폰으로 읽다가 졸음이 쏟아지면 화면만 끄고 자버리면 그만인 게 또 나름의 장점이더라.
그래서 요새는 누워서 놀 때는 실물 책으로, 자기 직전에는 이북으로 읽곤 한다.
여하튼간에 최근에는 책으로 많은 위안을 받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사람 때문에 무너져도 다시금 나를 일으키는 것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제아무리 내 생각만 하며 동굴로 깊이 들어가 버리곤 당장이라도 사람이라고는 다 필요 없는 것처럼 무례하게 군 나를 묵묵히 기다려주고 걱정해 주고 꾸준히 연락해 주며 밥은 먹었는지 궁금해하며 반찬을 챙겨주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