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dy as a Distributed System]
이 글은 비전공자의 창의적 해석입니다. 본문에 포함된 의학·생물학적 사실은 공개 학술 자료를 참고했으며, 의학적 조언이나 진단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건강 관련 판단은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간 기능 저하와 편도선 붓기의 연결은 직접 인과가 아닌, 면역력이라는 중간 경로를 통한 간접 연결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I 정보
우리 몸은 하나의 중앙 서버가 운영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각자의 역할을 가진 노드들이 신호를 주고받으며 합의해 나가는, 분산원장 네트워크에 가깝다. 이 시리즈는 그 노드들이 어떤 순서로, 왜 등장했는지를 따라간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을 때, 흘릴 것은 이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성품이 아니었다.
난황낭(yolk sac)이라는 구조가 있다. 심장보다 먼저, 발생 15~17일경부터 이곳에서 원시 적혈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7] 핵을 가진, 태아 전용 헤모글로빈을 쓰는, 어디까지나 임시 버전의 혈액이다. 네트워크 언어로 하면 부트로더에 가깝다 — 정식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미리 올려두는 것.
발생 22일, 배아의 심장 관이 융합되면서 혈류에 방향이 생기고, 23일째에 최초의 박동이 시작된다.[1] 바로 이 순간, 난황낭의 혈관계가 배아 내부 순환과 연결되면서 미리 만들어져 있던 원시 적혈구가 심장에 의해 펌프질 되어 돌기 시작한다.[7] 펌프가 켜지자마자 흘릴 것이 공급된 게 아니라, 흘릴 것이 먼저 준비되어 있다가 펌프가 켜지는 순간 순환에 합류한 것이다.
그러나 배아는 빠르게 커진다. 임시 버전 혈액만으로는 곧 한계가 온다. 핵이 있는 원시 적혈구는 크기도 크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성장하는 조직에 산소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더 많은 수의, 더 나은 버전의 적혈구가 필요했다.
발생 3주 차, 간의 싹이 처음 트인다. 5주에서 10주 사이, 간은 배아 전체에서 가장 빠르게 커지는 장기가 된다.[1] 이 시기 간의 첫 번째 임무는 해독도, 대사도 아니다 — 난황낭이 만들던 원시 적혈구를 대체할, 핵이 없고 성능이 개선된 확정형(definitive) 적혈구를 대량 생산하는 것이었다.[7]
네트워크 언어로 번역하면, 간은 부트로더가 올려둔 임시 버전을 받아 정식 버전으로 교체 배포하는 업그레이드 노드다. 난황낭이 시스템을 일단 켜두었다면, 간은 그 시스템을 제대로 된 버전으로 다시 올린다.
조혈 역할의 이전은 두 번 일어난다. 처음엔 난황낭에서 간으로. 그리고 다시 간에서 골수로.[7] 태아가 성장하면서 뼈가 만들어지고 그 안에 골수가 자리를 잡으면, 적혈구 생산의 주도권은 조금씩 골수 쪽으로 이동한다. 출생 무렵이 되면 간의 조혈 기능은 거의 완전히 골수로 이전된다.[2]
이것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어떤 모듈이 초기에 임시로 여러 역할을 맡다가, 시스템이 성숙하면 그 역할을 전용 모듈에 넘기고 자신의 핵심 기능에만 집중하도록 정리하는 것을 리팩토링이라 부른다. 간은 정확히 그것을 했다. 처음 설계될 때부터 조혈이 간의 영구적인 역할로 기획되지 않았다는 듯이, 타이밍이 되자 미련 없이 넘겼다.
조혈 기능을 골수에 마이그레이션 하고 난 간에게 남은 것은, 오히려 더 방대한 연산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간은 500가지 이상의 생화학 반응을 처리한다.[3] 해독, 단백질 합성, 지질 대사, 포도당 저장 및 공급, 담즙 생성, 면역 단백질 생산, 약물 대사. 이것들이 동시에, 쉬지 않고 일어난다.
단일 장기가 이 정도의 병렬 연산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몸에서 간이 유일하다.
분산원장 네트워크로서의 몸에서 뇌가 CPU와 GPU를 겸하는 중앙 연산 노드라면, 간은 전용 GPU 클러스터에 가깝다. 판단하지 않는다. 묻지 않는다. 들어오는 것을 받아 처리하고 내보낼 뿐이다. 그 처리가 동시에, 500가지 넘게, 멈추지 않고 일어난다.
분산원장 네트워크의 언어로 옮기면, 간은 고성능 연산 노드이자 정제소다. 네트워크 전체를 흐르는 원자재를 받아 처리하고, 독소를 걸러내며, 각 노드가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해 다시 내보낸다.
포털 정맥(portal vein)이라는 구조가 있다.
소화기관에서 흡수된 모든 것 — 영양소든, 독소든, 약물이든 — 은 전신 순환으로 진입하기 전에 반드시 이 경로를 통해 간을 먼저 통과하도록 설계되어 있다.[4] 간은 이 혈액의 약 75%를 포털 정맥으로 받고, 나머지 25%는 산소를 공급하는 간동맥으로 받는다.[4] 두 경로로 입력을 받아, 하나의 출력으로 내보낸다.
이 구조를 네트워크로 읽으면, 간은 관문(Gateway)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데이터가 메인 네트워크로 유입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검증 레이어. 불순물을 걸러내고, 필요한 형태로 변환하고, 그제야 나머지 노드들에게 내보낸다. 이 구조를 모르고 있었다면, 인체가 왜 어지간한 독소를 함유한 음식에도 대부분 큰 문제없이 버텨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간이 먼저 처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간에서 초회 통과 효과(first-pass effect)가 일어난다”는 표현의 실체다. 약을 먹었을 때 간이 먼저 그 성분의 상당량을 처리하기 때문에, 같은 약이라도 주사로 맞는 것과 먹는 것의 효과가 다르다. 관문을 통과하는가, 우회하는가의 차이다.
심장은 소리를 낸다. 박동이 느껴지고,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이 온몸으로 전달된다. 폐는 숨으로 존재를 알린다. 위는 비면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간은 거의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간에는 통증을 감지하는 수용체가 극히 적다. 간 자체가 손상되어도 통증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간 질환의 증상 — 피로, 황달, 복부 불쾌감 — 은 간 기능이 상당 부분 소실된 이후에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5]
이것이 간염이나 간경변이 조용히 진행되는 이유다.
패러다임 언어로 이것은, 간이 자신의 상태를 네트워크에 broadcast 하지 않는 노드라는 뜻이다. 조용히 일한다. 에러 로그를 외부로 내보내는 인터페이스 없이, 임계점에 도달해 기능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이상 신호가 거의 없다. 어쩌면 설계 의도일 수도 있다. 관문이 “지금 저 좀 힘들어요”를 실시간으로 알리는 구조였다면, 우리는 식사할 때마다 간의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다만, 간의 침묵이 곧 네트워크 전체의 침묵은 아니다. 간 기능이 저하되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그 부하는 다른 노드들에게 분산된다. 피로가 쌓이거나 음주가 잦을 때 편도선이 붓는 것이 그 예다 — 관문 노드가 제 역할을 못할 때, 말단 면역 노드가 대신 경보를 울리는 것이다. 간은 말하지 않지만, 네트워크는 결국 어딘가에서 신호를 낸다.
뇌는 포도당을 거의 유일한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뇌의 무게는 체중의 약 2%에 불과하지만, 몸 전체 포도당 소비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뇌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자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뇌는 쉬지 않는다.
문제는 뇌가 포도당을 저장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혈당이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뇌는 즉각 기능 이상을 일으킨다. 판단력 저하, 집중력 감소, 극단적인 경우 의식 소실. 그런데 우리는 하루에 세 번만 먹는다. 식사와 식사 사이, 그 긴 공백 동안 뇌에 포도당을 계속 공급하는 것이 간이다.
간은 글리코겐 형태로 포도당을 저장해 두었다가, 혈당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이를 분해해 혈액으로 방출한다. 공복이 길어지면 간은 아미노산과 지방산으로부터 포도당을 새로 합성하기까지 한다.[6] 이것을 포도당신생합성(gluconeogenesis)이라 부른다.
분산원장 패러다임으로 보면, 간은 뇌라는 합의 조율 서버가 계속 가동될 수 있도록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 노드이기도 하다. 심장이 타이밍 기준점이라면, 간은 연산 비용을 묵묵히 충당하는 백엔드 레이어다. 뇌가 복잡한 판단과 감정 처리, 기억 통합을 수행하는 동안, 그 연산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 인프라를 소리 없이 유지한다.
간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관문이기도 하고, 정제소이기도 하고, 발전소이기도 하다. 500가지 이상의 반응이 동시에 일어나는 복합 연산 노드다. 그런데 그 시작은 훨씬 단순했다. 적혈구를 만드는 것. 오직 그것 하나.
역할이 변했다. 더 정확하게는, 초기의 역할을 내려놓고 더 복잡한 역할들을 맡게 되었다. 조혈이라는 임시 기능을 골수에 마이그레이션 하고, 자신은 네트워크 전체를 위한 정제소이자 검증 레이어, 그리고 뇌를 위한 에너지 공급자가 되었다.
소프트웨어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모듈들은 처음부터 완성형이 아닌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 존재했다가, 시스템이 커지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간다. 간은 그 과정을 몸 안에서 조용히, 그리고 완전히 해낸 노드다.
성숙한다는 것은, 어쩌면 임시로 맡았던 역할을 내려놓고 자신의 것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1] StatPearls, “Embryology, Weeks 6-8” — NCBI Bookshelf https://www.ncbi.nlm.nih.gov/books/NBK563181/
[2] Anatomy & Physiology 2e, “Embryonic Development”, Oregon State University Open Educational Resources https://open.oregonstate.education/aandp/chapter/28-2-embryonic-development/
[3] Johns Hopkins Medicine, “Liver: Anatomy and Functions” https://www.hopkinsmedicine.org/health/conditions-and-diseases/liver-anatomy-and-functions
[4] StatPearls, “Physiology, Liver” — NCBI Bookshelf https://www.ncbi.nlm.nih.gov/books/NBK535438/
[5] Britannica, “Liver” https://www.britannica.com/science/liver
[6] PMC, “Energy Metabolism in the Liver”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4050641/
[7] StatPearls, “Embryology, Hematopoiesis” — NCBI Bookshelf https://www.ncbi.nlm.nih.gov/books/NBK544245/
PMC, "The embryonic origins of erythropoiesis in mammals" — American Society of Hematology
https://ashpublications.org/blood/article/119/21/4828/29910/
다음 편에서는 출생 순간까지 오프라인 상태를 유지하다 스위치가 켜지는 노드, 폐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