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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파괴한다.

영원히 사는 비결?



최근 10년 동안 5번 이사했다. 포장 이사 덕분에 힘들지는 않았다. 고생은 포장 이사 직원분들이 많이 하셨다. 이사 당일 포장 이사팀이 우리 집에 와서는 난색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책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포장 이사팀이 가장 싫어하는 짐이 책이란다. 개수도 많고, 부피 대비 무겁기 때문이다.


내 서재에 내 책으로만 채워진 책장이 7개. 한 권 한 권 사연이 있고 낱장마다 내 손때가 묻은 아이들이다.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누나들이 있고, 어머니가 책을 좋아하신 편이라 집에 책이 많은 편이었다. 집에 있는 책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래서 새로운 컨텐츠에 목말랐었다. 하루는 반 친구네 놀러 갔는데 딱따구리 그레이트북스 전집이 있는 거였다. 완전 새 책이었다. 마침, 집이 가까워 빌려 읽을 수 있었다. 친구 어머니는 기껏 비싼 돈 주고 책을 사줬더니 자기 아들은 안 읽고, 남의 집 아이가 열심히 빌려 읽는 모습이 유쾌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 눈총을 받으면서 결국 몇 달에 걸쳐 친구네 책을 몽땅 빌려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정신은 자유로웠다. 활자가 상상이 되는 체험은 신기하고 멋진 일이었다. 독서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오락이었다.


대학교 들어가서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당시 도서관 로비에는 한약방 서랍장같이 생긴 도서 색인 카드 보관함이 벽면을 가득 채우며 배치돼 있었다. 실제 책을 보고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작가별 제목별 도서 카드를 골라 대출증과 함께 도서관 사서에게 접수하면 몇 시간 후에 책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빌린 책 맨 뒷면에는 대출 카드를 꽂는 작은 봉투가 있었다. 그 카드에는 책을 빌린 사람의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가끔 익숙한 이름을 보면 '이 사람은 나랑 책 읽는 취향이 비슷하구나. 실제로 만날 수 있을까?' 하며 낭만적인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사회인이 되고, 가정을 꾸리면서는 지역 도서관을 많이 이용했다. 주말마다 온 식구가 도서관에 가서 책 보고 놀았다. 아쉽게도 아이들이 나만큼 책을 즐기지는 않았다.


내게 책은 즐거움과 배움의 통로다. 그래서 책 욕심이 많았고 빽빽한 장서로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내 공간이 책들을 감당하기 버거워졌다. 죽을 때까지 이 많은 책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다. 더구나 내가 죽은 다음에는 처치가 더 곤란하다.


그래서 책을 파괴하고 있다.


책 제본 부위를 작두로 잘라내고 낱장으로 분리한 후 스캐닝한다. 이미지를 확인한 후 pdf로 만든다. 스캐닝 도구에 따라 별도로 OCR 작업을 하기도 한다. 종이에 찍힌 활자가 디지털로 변환된다. 책으로서의 실체는 사라지지만 내용은 그대로 남는다.


책을 전자화하는 작업은 꽤 좋은 점이 많다.

1) 우선 공간을 준다. 책장이 비워짐에 따라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2) 검색이 용이하다. 필요한 키워드만 넣으면 순식간에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다.

3) 책을 들고 다니는 수고를 덜어준다. 가방이 가벼워진다. 태블릿만 있으면 수백 권을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다.

4) 노안이 와서 작은 글씨 보기가 힘들 때 화면을 확대하여 얼마든지 큰 글씨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5) 책을 오히려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옛날 책들은 누렇게 변색되며 바스러지기도 하는데, pdf 파일은 영원히 품질을 유지한다. 최근 꽤 오래전에 사서 변색된 책을 전자화하여 태블릿으로 다시 읽었는데 황변된 페이지의 이미지가 그대로 느껴져 나름 운치 있었다.

6) 마지막으로 이게 백미다. 필요에 따라 전자책을 chatGPT에 넣으면 탁월한 맞춤형 솔루션을 얻을 수 있다. 정말 기막히다. 특히 전문 서적이나 외국 원서의 활용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 분야별 자료들로 GPTs를 만들어 실제적인 도움을 받으며 잘 사용하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도 이렇게 되는 것일까? 육체는 죽고 없어지지만, 오히려 본체인 영혼은 남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더 자유롭고 쓸모 있게 되는 걸까?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을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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