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 워크샵에 다녀와서
"형법 제269조에 명시된 '낙태죄'는 1953년 제정됐다. 그러나 과거 '애 안 낳는 것이 애국'이었던 시절, 정부 주도의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 아래 소위 '낙태 버스'가 마을 곳곳마다 순회하기도 했다. 당시 가임여성의 35%가 낙태를 한 번 이상 경험했다는 통계가 있을 만큼 낙태는 공공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출생 시대에 접어들자 낙태는 '갑자기' 죄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가임여성 지도'를 제작하여 배포하기까지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가 여성의 몸을 필요에 따라 '출산의 도구'로서 통제하려 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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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춘천여성민우회와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하고 일시정지시네마에서 열린 "자, 이제 낙태죄 폐지타임"이라는 프로그램에 다녀왔다. 여성들의 임신중절 경험을 담은 <자, 이제 댄스타임>을 보고 작은 강연을 들은 뒤 각자 낙태죄 폐지 피켓을 만드는 워크샵을 짧게 진행했다. 오늘의 시간 중 기억에 남았던 것을 몇 가지 나누고자 한다. 영화에서 다뤘던 임신중절의 경험담에 대한 것은 남성인 내가 섣불리 남길 수가 없다고 생각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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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가 합헌이라는 판결을 했던 과거의 헌법심판 영상을 보는데 대부분의 판사들이 남성인 점이 우습고도 끔찍했다. 낙태죄가 남성의 법이라는 참고인의 말에 버튼이 눌린 남성 판사가 남녀를 가르지 말라는 논조로 말하는 걸 보면 수많은 여성 대상의 범죄자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나라답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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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는 태아를 떨어트린다는 의미를 지닌 한자어로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어 인공유산, 임신 중단, 임신중절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임신중절은 형법 269조에 의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모자보건법상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우생학적 사유, 윤리적 사유, 의학적 사유). 하지만 우습게도 여기에는 24주 이내여야 하며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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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의 주요 논거에 대해 인구조절 도구, 건강권 침해, 협박수단까지 총 3가지를 언급했다. 건강권 침해와 협박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것은 여러 차례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낙태죄를 국가가 인구조절 도구로 사용하며 상황에 따라 ON/OFF 했다는 부분은 이번에 처음 들었다. 과거 산아제한 정책부터 현재의 출산장려정책까지 그간 국가는 여성들을 출산 도구로만 보며 모든 정책은 국가발전을 근거로 숫자의 차원으로만 접근되었다. ‘낙태버스’를 공공연히 운영하던 국가가 출산율이 하락하자 ‘맘 좋은 버스’를 운영하는 것은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일이다. 가임기 지도를 배포하는 국가에게 여성이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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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낙태죄 폐지에 대한 논의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건강권을 대립시키는 잘못된 프레임으로 접근해왔다. 낙태죄 폐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은 국가가 불가피하게 임신을 중단할 여성’만’을 ‘형사처벌’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라는 것이다. 과거 개인의 신념의 차원으로 임신중절의 찬반을 물었던 것과는 달리 최근엔 여성의 삶과 건강권, 그리고 ‘죄’라는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낙태죄 폐지의 프레임은 국가의 인구조절 정책과 여성의 기본권이라는 것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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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4일 목요일에 낙태죄 폐지에 대한 헌법재판소 공개변론이 진행되었다. 법무부의 말도 안 되는 의견으로 인해 다시 한번 분노했지만 이러한 분노가 유의미하려면 앞으로도 해당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