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순간은 평생 각인된다.
나의 친부는 내가 외동이라 버릇없이 자랐다는 말을 끔찍할 정도로 경계하던 사람이었다. 목욕탕에서 물장구를 치는 걸 보고 다른 손님이 뭐라고 하자 목욕탕 한복판에서 내 뺨을 때렸고 붕어빵을 다른 어른들에게 먼저 권하지 않았다고 고함을 치며 욕을 했다. 특히 음식을 먹을 때 ‘쩝쩝’ 소리 내는 것을 견디지 못했는데, 덕분에 나 또한 ‘쩝쩝’ 소리 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됐다. 물론 내 입에서 나는 소리도.
친부는 자주 술에 취해 들어왔다. “세상에 올 때 내 맘대로 온건 아니지만은~ 내 가슴에 꿈도 많았다~~~”라는 가사의 노래를 서럽게 울부짖으며 불러댔다. 그렇게 그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잠그고 누워있었다. 혹시라도 방문을 잠그는 소리를 들키면 문을 부수고 들어올까봐 문고리를 먼저 돌리고 잠금 버튼을 눌러 ‘딸깍’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그리고 그가 잠들면 잠금 버튼을 먼저 누르고 문고리를 돌려 ‘딸깍’ 소리가 나지 않게 잠금을 풀고 다시 잠을 청했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오래된 가게를 들렀을 때 누르는 방식의 잠금 버튼이 달린 동그란 문고리를 마주치면 아직도 “딸깍” 소리가 나지 않게 어린 시절과 똑같은 방법으로 문을 잠그고 연다.
처음 대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회사는 살면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느끼게 만든 곳이었다. 자존감은 낮았지만 자신감은 있었던 당시의 나에겐 꽤나 치명적이었다. 사사건건 나를 혼내던 당시의 팀장은 나중에서야 내 기세를 꺾으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아직까지 나에게 영향을 주는 순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졌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직원들을 대하는 게 달랐던 A는 복합기 뚜껑이 올라가 있는 걸 견디지 못했다. 누군가 복합기를 사용한 후 덮개가 올라간 것을 발견하면 소리를 지르며 불같이 화를 냈다. ‘아 오늘은 기분이 안 좋네. 복합기 올려놨다간 진짜 난리 나겠다.’ 출근을 하면 그의 기분을 살피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그렇게 1년가량을 보낸 탓인지 아직도 복합기 덮개가 올라가 있는 게 거슬린다. 사무실에서 복합기 덮게가 올라가 있는 걸 발견하면 조용히 내려놓는다.
나를 많이 챙겨줬던 B는 운전이 미숙한 내가 운전을 하는 차에 타면 대체로 조수석에 앉아 “한 손으로 운전하지 마라”거나 “직진은 천천히 하더니 유턴은 왜 이리 빨리하냐”는 등 나의 운전습관을 혼내곤 했다. 특히 그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릴 때 들리는 ‘드르륵’ 소리를 거슬려했다. 운전이 꽤 능숙해진 지금, 한 손으로 운전하든 유턴을 어떻게 하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아직도 나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릴 때 버튼을 먼저 눌러 ‘드르륵’ 소리를 나지 않게 한다.
쩝쩝과 딸깍 그리고 드르륵, 방문과 복합기 그리고 사이드 브레이크에 아직도 갇혀있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위계가 작동하는 관계에서 각인된 습관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심지어 이 모든 게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덕분에 위계적인 관계에서 내 말의 무게를 고민하고 타인의 행동이 나를 불편하게 할 때 그 원인이 뭔지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생겼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일이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 소리를 지르는 어른은 방안의 아이가 조용히 문을 잠그고 숨을 죽인 채 울고 있다는 걸 모른다. 사이드 브레이크 올릴 때 나는 소리와 복합기 덮개가 올라가 있는 게 거슬린다면 그건 본인의 문제다.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기분에 따라 타인을 다르게 대하지 않아야 건강한 어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건강한 어른인가? 나의 위치를 인식하고 내 기분을 타인에게 던져대고 있지는 않을까?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위계 속에서 살아갈 텐데, 잘못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 고립돼버릴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