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화신 Jan 26. 2022

표해록의 첫 장을 기록하며



여행의 진가는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특히 여행에서 돌아오는 당일과 그다음 날이 결정적이다. 그 이틀의 자신을 살펴보라. 변화했는가? 그럼 그 여행은 당신의 내면에 어떠한 작용을 일으킨 거다. 변화, 그것만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제주 보름살이에서 어제 돌아왔다. 그곳에 있는 동안은 몰랐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알았다. 내가 변화했음을. 뭐랄까, 강박적이고 경직된 성향이 한결 헐겁게 풀어졌고, 일상이 짜인 무언가가 아닌 유동적으로 흐르는 무언가로 인식됐다. 나를 압도하는 듯했던 삶의 터전이 내 아래에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컨트롤하기 편해졌달까. 여러 부분에서 재인식이 이뤄졌다.



제주에 있는 동안 내가 반복해서 읽은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시리즈 중 하나인 <니체를 쓰다>였다. 니체는 오직 변화만을 추구했다. 자기 인생 안에 온갖 고통과 위험이 있길, 끊이지 않고 그것들에 휩쓸리길 원했다. 그것만이 자신을 변화하게 해 준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는 안정을 혐오했다. 안정은 생명력의 저하로 자신을 인도할 뿐이므로. 더 위험해지길! 더 치명적이 되길! 이 얼마나 열정적인 태도인가.


그의 본질은 지속적인 변전, 자기상실을 통한 자기인식, 요컨대 영원한 생성이며, 결코 경직된 채 쉬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존재하는 그대여, 변화하라"는 말은 따라서 그의 모든 글에 관류하는 삶의 명령이었다. ㅡ <니체를 쓰다> p.86 중


내 여행의 목적이 있다면 쉼이 아니라 자기상실이 아닐까 싶다. 자기상실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도, 새로운 형태로 다시 구축할 수도 있으므로. 슈테판 츠바이크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괴테는 자신의 어떤 부분도 희생함이 없이 자신을 넓혀 나갔다. 그는 상승하기 위해 자신을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변전을 추구하는 니체는 자신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 언제나 자기파괴를 거듭해야만 했다."


자기상실로부터 비롯되는 변화. 이것이 가능하게끔 날 도운 것은 제주의 바다였다. 매일 바다를 찾아갔다. 파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파도는 계속 사라지는구나, 형성됐다가 부서져서 없어져버리는구나, 그다음 곧바로 새롭게 만들어지는구나, 계속 그렇게 구축됐다가 상실되고 구축됐다가 상실되면서 '살아있는'구나.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생명력을 고양시키는구나.



파도가 부서지지 않으면 새로운 형성도 없다. 머물러 있는다면 그건 바다가 아니다. 바다를 닮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닮고 싶은 이유를 찾은  같다. 이전에는 그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의 넓디넓음이 동경의 이유였다면 이젠 나만의 진짜 이유가 생긴 것이다. 바다는 지속적인 변화고, 이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  자체다. 파도의 부서짐,  지속적인 자기파괴야말로 나를 사로잡은 바다의 결정적인 매혹이다.


보름살이 숙소는 한담해안산책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 산책로의 시작엔 '장한철 산책로'라고 크게 새겨진 돌이 서 있다. 장한철은 <표해록>을 쓴 문인이다. 표해, 말 그대로 바다에서 표류한 경험을 쓴 글이다. 1771년 제주도 선비였던 장한철은 과거를 보러 육지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류큐왕국(오키나와)으로 표류했고 그는 표류 당시의 상황과 류큐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글로 써서 <표해록>을 남겼다. 제주의 마지막 날, 난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장한철의 표류 기록을 상세히 볼 수 있었는데 특히 '표류로 얻은 뜻밖의 견문'이라는 글귀에 마음이 멈춰 섰다.


표류는 어쩌면 파도의 부서짐 같은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로 가는 일에 실패하여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는 변수. 계획했던 것이 파도처럼 처참히 부서지는 일은 자기파괴의 일종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만나게 되는 새로운 세계가 있었고, 표류한 자만이 확장할 수 있는 삶의 지평이 있었다. 그것 또한 일종의 변화다. 삶의 지평은 변화를 통해서만 넓힐 수 있다.



내가 제주에서 내내 품고 있던 주제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변화, 위험, 삶의 지평.


삶은 이토록 아이러니하다. 지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삶은 정체되고 경직되며 삶의 지평은 좁게 머문다. 지금까지 나는 삶을 지키고, 지킨 채로 성장하고자 애썼다. 견고히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젠 알 것 같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성장이 아니라 변화라는 것을. 흐르는 강물은, 바다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그저 끊임없이 흐르면서 변화한다. 나도 그렇게 계속 나를 파괴하고 버려가며 흘러야 한다. 변화하는 게 성장하는 것보다 낫다.


자, 그럼 이제 표류를 시작해볼까.


작가의 이전글 찢어 버리거나 불태울 글을 쓰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